죄의 드러남은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통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 누가복음 5:32 –
오직 주님만이 전부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인간을 향해 달려오셨는가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볼수록
자기 연약함을 부인할 수 없게 될수록
십자가의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전부이심이 드러납니다
자기 의에 머무는 종교성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은
죄를 죄로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 상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로 자신을 지키려는 종교인들 역시
죄를 직면하기보다
자기 의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동일하게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복음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신앙이란 언어로 가려지는 인간의 이중성
주님을 채찍질하고 못박으며
기뻐하던 자들의 모습은
특별한 악이 아니라
우리 본성의 실상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또 못박는 옛사람의 본성은
거듭난 이후에도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자아가 위협받는 순간
더 분명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영성과 경건이라는 공간 안에서도
관계의 힘과 감정의 흐름은 작동합니다
다만
성령 안에서 얼마나 절제하느냐의 차이일뿐입니다
죄가 넘치는 곳에 보혈은 더 강하게 튑니다
죄에 넘어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에게서 물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멈추라’ 속삭이는 것은 거짓아비의 음성이고
‘나아오라’ 부르시는 이는 주님이십니다
마음의 중심은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들어갈 때
거룩과 정결함을 갖춘 행위는
형식이 아니라 경외의 표현입니다
이는, 복을 얻기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의 방향입니다
겉모습이 경건함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행실은 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죄인을 찾으십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숨었을 때
아버지께서 먼저 부르십니다
아담아~
그리고 그들에게 가죽옷 (주의 찢긴몸)을 입히십니다
회복은
항상 하나님 편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찢어 나를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죄가 누적되면
회개없이 살아가는 삶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라도
내면에서는 서서히 잠식이 일어납니다
죄는 반복될수록
양심을 무디게 합니다
한번 익숙해진 패턴은
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미룰수록
회개는 점점 멀어집니다
참 영성은 증명하는것이 아닙니다
성령안에 거하는 삶은
죄가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죄에 더 민감해지는 삶입니다
작은 죄 앞에서도
마음이 찔리고
하나님 앞에 멈춰서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의인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 앞에서 부서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도 다윗도
죄를 합리화하기보다
그분 앞에서 무너졌고 고백했고 탄식했습니다
복음은 영혼을 살리는 칼
복음은 날카롭지만
사람을 죽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어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입니다
그 길은 언제나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다시 소생시킵니다
그래서 복음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끝까지 주님의 열심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도망치는 인간을 향해
침묵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며
십자가까지 따라오신 열심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회개의 깊이로도
눈물의 양으로도
믿음의 강도로도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요6:44, 엡 2:8–9 롬 9–11)
이것들은 그저 거듭난 자들의 응답일뿐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시작하셨고
감당하시며
그분이 완성하십니다
다시말해
사람의 의지나 성실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어 살리신
하나님의 열심이 극대화된 사건이 십자가였습니다
(요3:16, 로마서 5:8, 갈 2:20)
주님,
당신만이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가 살고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