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14)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성경 지식은 매우 높았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민족이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을
정통 유대교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해괴한 말을 퍼뜨리는 사람으로, 혹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적 사고와 맞지 않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설득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의외로 매우 소수인 것 같습니다.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예수님의 말씀 중에 유대인들의 귀에 거슬렸던 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이 곧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는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자신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하며
포로된 상태의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들은 자신들이 종된 상태에 있는 줄을
모를 뿐 아니라 자유를 누린다는 의미조차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37)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단지 피상적인 이해의 수준에서 맺어진 결론은
예수를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합니다.
다음부턴 그들의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연락해도 만나기가 어렵게 됩니다.
어쩌면 그들 손에 죽지 않는 것만도 다행스러울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매우 거세게 이단으로 정죄받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42)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 알아듣고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곧 아버지의 뜻임을 곧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셨다는 말씀에도 심히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만일 거듭난 자가 하나님께로 왔다고 말한다면
그는 심한 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43)며
책망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 사람의 삶의 특징을 모르기 때문이며
이미 자신들이 거듭난 것으로 믿지만 실제로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을 귀가 없는 것은 그들이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44).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귀신들린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조금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행하는 모든 행위는 단지 종교적 행위이며
믿음이나 충성과 거듭남, 영생, 거룩, 성화, 영화가 없거나 아니며,
하나님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성경적인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들이 십자가 복음을 듣고서 당황스러워 하거나
때로는 전혀 다른 복음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드물게 만나는 사람들 중에
그 말씀을 참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척 적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귀신들린 사람 취급했던 유대인들이나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그 의미를 알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복음을 곧 알아채리고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듣는 상당 수의 안타까운 점은 율법적인 신앙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현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만 광야에 있고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꼭 교회를 떠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신앙 방식이 틀린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참 복음을 들었을 때에 율법적 삶을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의 바탕은 '자기 사랑'에 있습니다. 모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성격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는 자는 모든 율법적 삶의 환경에서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율법적이며 기복적입니다.
그것은 사단이 아담의 생명 속에 심어놓은 본성입니다.
참 복음을 듣고서 기성 교회에서 율법적 말씀을 듣게 되면
듣는 만큼 참 복음을 향한 길은 멀어질 수 있습니다.
본성이 율법적인 사람은 율법적 말씀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은혜가 정 반대임을 안다면 벗어나는 것이 현명합니다.
요즘엔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서 잃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곧 물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입니다(벧후2:17).
만일 물없는 샘이나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를 보고서 그들을 복음 증거자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같은 부류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어보지 않는 사람은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그들의 거듭남이나 십자가 체험은 헛된 주장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다른 음성을 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증거는 율법과 은혜가 뒤섞인 먹지 못할 말씀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지 듣고 읽은 지식에 속한 것들 뿐입니다.
복음이란 자신이 실제로 죽어보고 성령을 받아보기 전에는 확실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예수님을 보고도 무시했던 것처럼,
참 복음을 알고 그 안에서 사는 자를 보고도 무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 복음을 모르는 자는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자기 영광을 구한다면 그는 복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 자요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입니다.
그같은 자를 보고서도 알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소수 중에서도 소수인 하나님께 속한 사람만이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는 복음을 듣고도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나온 모든 잘못된 신앙을 순식간에 정리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정말 희귀할 정도로 적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