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죽었는가?

 

첫 번째로 나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

 

옛 사람은 죄의 사람을 말한다. 

옛 사람은 범죄한 아담을 의미한다.

옛사람은 중생되지 못한 죄 덩어리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충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세상 유행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다니는 사람을 의미한다.

옛 사람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서 난자를 의미한다.

 

이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완전히 죽었다.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다.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새 사람이 된다.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나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사탄 마귀에게 

선포를 하시기 바란다. 

“사탄아! 마귀야! 나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완전히 죽었음을 선포한다. 

나는 새 사람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또한 “나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 하시기 바란다.

 


두 번째로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 

‘내가’는 바로 ‘옛 사람’ 혹은 ‘나의 자아’이다.

보통 내가 하면은 나의 자아를 의미한다.

내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죽고 주님으로 사는 것’이다.

 

자아는 가장 강력한 것이다. 

자아는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말한다.

그 사람의 전 성격을 말한다. 

자아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자아가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 되었다.

이 자아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다.

아담이 하와가 오는 것을 보고 이 자아로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했다. 

이 자아로 자기를 보지 않고 남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하나님을 보았다.

 

그런데 범죄 한 이후로 이 자아는 ‘자기중심적’으로 바뀌었다.

이 자아가 남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 되었다.

이 자아가 하나님이 되어서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이 자아로 자신은 너그럽게 용서 하고 남은 냉철하게 판단하고 비방을 했다.

바로 이 ‘옛 자아’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자아를 더 좁게 말하면 ‘자존심’이다.

세상에서도 하는 말이 

“내가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내 자존심만은 양보하지 못하겠다”고들 한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다른 것은 양보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 남은 자존심마저 잃게 된다면 다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난리를 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아(자존심)가 죽이 않으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을 수 없다. 

자아(자존심)가 죽지 않으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교회 생활을 잘하다가도 자아(자존심)를 건드리면 

시험이 들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봉사를 잘 하다가도 자아(자존심)를 건드리면 

시험이 들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어떤 집사님이 시험이 무척 들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찾아가서 이유를 물은 즉 어떤 집사님이 살 빼라고 해서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집사님의 건강을 위해서 좋은 뜻에서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자존심만 상하면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주일이고 없다.

이렇게 자존심은 하나님보다 높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강대상에서 

책망의 설교, 회개하라는 말씀을 잘 전하지 않는다.

이런 모든 말씀은 교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자아(자존심)는 ‘가장 무서운 내 안에 우상’이다.

이것을 아는 분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밖에 있는 우상, 보이는 우상은 

자존심이라는 우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보이는 우상은 누구든지 말을 안 해도 잘 안다.

그리고 성경에 탐심은 우상이라고 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우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돈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자식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지금 심각한 우상인 인터넷 과 T.V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잘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아(자존심)라는 우상이다.

이것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존심이 우상인줄 모른다. 

자아(자존심)가 얼마나 무서운 우상인지를 알아야한다.

그리고 내 안에 가장 무서운 우상인 ‘자존심’을 파쇄해야 한다.

사탄이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자아 즉 ‘자존심’이다.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십자가 복음에서 가장 죽이기 힘든 것이 자아(자존심)이다.

자존심이 죽어야 만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살 수 있다.

십자가에서 자아(자존심)가 완전히 죽었을 때에 

온전히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시게 된다.

자아(자존심)의 특징이 있다.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겠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남의 충고를 듣는 것을 싫어한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이야기하면 

                           마음이 상해서 못 견딘 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끝까지 변명한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안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하면 

                          민감 하게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자존심이 상해서 그날 잠을 제대로 못 잔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끝까지 관철 시키려고 한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사소한 이야기에도 웃어넘기지 않고 흥분해서 대든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주로 혈기를 잘 낸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순종을 잘 하지 않는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책망 설교할 때에 말씀을 거부한다. 마음 문을 닫는 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자기 자신을 모른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명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사람은 남을 비판 판단 능력이 강하다.

 

자아(자존심)가 강한 교인들이 남의 충고를 듣지 않고 

설교 중에 책망을 하거나 충고를 하면 마음 문을 닫고 

설교를 잘 듣지 않는다.

자존심 강한 사람에게 훈계나 책망설교를 할 때에 듣지 않거나 

거부를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마음을 갖는 것과 같다.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나에게 죄를 지적하지 마세요. 듣기 싫습니다. 

  다음부터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또 하면 교회고 뭐고 안 나올 겁니다. 

  제발 내 자존심 건드리지 말고 좋은 소리만 하세요. 

  알겠습니까? 

  하나님! 나하고 잘 지내려면 제발 책망 좀 하지 마세요”

설교시간에 자기의 죄를 책망할 때에 회개하지 않고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교인은 이렇게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자아(자존심)가 강해서 말씀을 거부하고 충고와 책망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존심이 무섭고도 무섭다.

 

이 자아(자존심)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한다

이 자아(자존심)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을 성령으로 믿으시기 바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말씀은 믿는 대로 된다. 

말씀은 믿는 대로 실체가 된다. 말씀은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기만 하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음을 

사탄 마귀에게 선포를 하시기 바란다. 

“사탄아! 마귀야! 나의 자아는, 

 나의 자존심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못 박혀 죽었음을 선포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을 선포한다.” 

이렇게 시간 나는 대로 날마다 십자가 복음을 묵상하고 선포하시면 

실제로 자아가 죽는 체험을 한다.

 


세 번째로 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 라”(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다. 

왜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까?

육체는 죄 덩어리이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말씀이 나온 이유가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고 했다. 

이 둘이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야만 죄를 짓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육체의 소욕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19절부터 나열을 하고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하면서 음행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죄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면서 죄의 종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다 나열하지 못하고 방탕함과 다음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다.

한도 끝도 없이 육체에 죄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죄들을 반복적으로 짓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쉽게 표현을 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바로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으면 

실제로 육체의 소욕이 죽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면 죄 덩어리인 육체가 죽었기 때문에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고 성령의 열매만 맺힌다는 것이다.

육이 죽고 영이 살았기 때문에 육신의 열매는 맺을 수 없고 

영의 열매만 나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2-23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온 것이다.

 

육체는 죄 덩어리이다. 육체는 새까만 죄 덩어리이다.

예수님을 믿어도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육체의 강렬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결과는 예수님을 믿어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된다.

 

죄를 짓지 않고 승리하려면 

죄 덩어리인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가능하다.

죄의 정욕은 아주 강렬하다. 

정욕이라는 단어가 강한 열정, 격정, 강한 욕망이라는 뜻이다. 

이 강력한 육신의 욕망을 제어할 길이 없다.

죄는 육체(육신)를 통해서 역사를 한다. 

그래서 죄의 정욕은 곧 육체(육신)의 정욕이다. 

그러니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을 읽어도 

생각으로 짓는 죄는 이겨낼 방도가 없다. 

특히 남에 대해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을 끊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육신(육체)이 죽지 않으면 육신대로 살게 된다.

로마서 8장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다. 

여기서 사망은 지옥의 사망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굴복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반드시 나의 육신(육체)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못 박혔다는 것을 믿어야하는 것이다. 

이 십자가 복음을 계속 묵상을 하면 실제로 죽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바로 성령님이 해주신다.

말씀을 먹고 묵상할 때에 성령님이 그 말씀을 가지고 

성령의 검이 되어서 내 육신의 소욕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말씀은 믿는 대로 된다. 

말씀은 믿는 대로 실체가 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인 나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사탄 마귀에게 선포를 하시기 바란다.

“사탄아! 마귀야! 나의 육체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완전히 죽었음을 선포한다.” 

이렇게 날마다 십자가 복음을 묵상하고 선포하시면 된다.

 


네 번째로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 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오늘날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느냐! 하고 합리화 시킨다.

그럴듯한 논리이다. 

인간은 연약해서 죄를 안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의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를 지어도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씀이 한마디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구약성경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씀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다. 

심지어는 완전하라고 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레위기 전체의 주제는 ‘거룩’이다. 

모든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은 거룩을 강조하셨으면 신명기에서 

포도원에 두 종자를 뿌리지 말라고 했고, 

밭을 갈 때에 소와 나귀를 같이 멍에를 메어서 갈지 말라고 했고, 

옷을 짤 때에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짜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신22:9-11)

 

그리고 오늘날 진정한 은혜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다.

은혜 하면 모든 것을 덮어주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참된 은혜를 알게 되면 

은혜! 은혜! 은혜를 함부로 남발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로마서 6장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하였다. 

분명 은혜 아래 있다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가 그 사람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은혜를 아래 있으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를 오해해서 죄를 지어도 된다고 반대로 생각을 하고 있다.

구원 문제에서는 절대적으로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은혜는 죄를 짓고 않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은혜이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씀은 한구절도 없다.

오히려 점도 흠도 없는 삶을 살라고 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 온전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우리도 아버지처럼 완전하라는 것이다.

영.혼.육이 거룩한 상태로 주님을 맞이하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십자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십자가에서 죄가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된다. 죽은 시체가 죄를 짓는 것을 보았는가?

죽은 사람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 

아무리 죄를 지으라고 유혹을 해도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 

강제로 시켜도 죄를 짓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죄가 죽었으니까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 죄가 죽었다는 것을 믿게 되면 

실제적으로 내 죄가 죽는 것이다.

이유는 믿는 대로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믿는 대로 역사한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죄가 죽었다는것을 믿게 되면 

실제로 죄가 죽기 때문에 사탄이 역사 하지 못한다. 

죽은 사람에게는 사탄이 어찌 할 수가 없다.

 

나는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것을 

사탄 마귀에게 선포하기 바란다.

“사탄아! 마귀야! 나는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못 박혀 죽었음을 선포한다. 

 죄가 다시는 나를 주관하지 못한다. 사탄아! 떠나갈지어다!”

하시기 바란다.

 


다섯 번째로 나는 ‘율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 7:4)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 라”(갈 2:19)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율법(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말씀대로 살려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해도 잘 되지 않는다.

나도 십자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주의 종이라는 사람이 죄를 안 지으려고 계속해서 기도도 하고 

때로는 금식도 했지만 죄의 근본 뿌리는 해결되지 않았다. 

죄를 지으면 강대상에 가서 회개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좀 시원하다. 

그리고 생활하다 보면 또 그 죄를 짓는다. 

그러면 양심이 괴로워서 회개 기도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시원하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죄를 짓는다. 

그러면 또 회개를 한다. 이것이 반복이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이것이 나에게는 괴로운 문제였다.

자아를 죽여 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자아가 잘 죽지 않았다. 

자아가 죽지 않으니까 나를 건드리면 

나 자신을 방어하기위해서 변명도 하고 언성도 높였다.

이러한 것이 나에게는 힘이 들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말씀(율법)을 내가 지키려고 하니까 안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율법적인 신앙이요, 율법주의 신앙이다.

성경에서도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다.

그런데 내가 말씀(율법)대로 살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미를 아는 것은 

중차대하고도 중차대한 문제이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멋지게 설명한 부분이 있다.

로마서7장 1절부터 3절까지 멋지게 설명을 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남편에게 매여 있다는 것이다.

남편의 법대로 아내는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남편의 구속을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남편 살아생전에는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벗어나는 길은 남편이 죽으면 된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 

남편을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이 여인은 무조건 남편으로부터 자유를 누린다.

율법과 나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비유를 들어서 

사도바울은 설명을 했다.

내가 율법에 대해서 죽으면 새로운 남편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반드시 죽어야한다는 것이다.

내가 율법에 대해서 어디에서 죽느냐가 문제이다.

바로 율법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 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7: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씀을 했다.

이 말씀의 뜻은 십자가에서 나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율법하고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나의 새 남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도 마찬가지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 라”(갈2:19)

 

사도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내가 율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 깨달아지면 복 중에 복이다.

내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유가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을 한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그리스도)아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연스럽게 사신 분이다.

왜냐하면 죄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안해도 말씀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지게 된다.

 결국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육이 죽고 

 영으로 살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에는 

율법이 없어도 본성적으로 말씀대로 살아졌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기 이전에는 죄가 뭔지도 몰랐다. 

삶 자체가 의로운 삶이었던 것이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이치이다.

 

지금 교회에 전해지는 복음은 말씀을 지키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나도 십자가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설교 시간마다 

말씀대로 살라고 강조를 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 철저하게 회개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니까 성도들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설교시간이 괴로운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는 힘들어도 말씀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말씀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교하는 나도 힘들었고 듣는 성도들도 힘들었다.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는 설교가 달라졌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내 죄가 죽어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말씀대로 살려고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말씀대로 살아진다고 

설교를 하고 있다.

내가 율법(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말고 율법에 대해서 죽으면 

자동적으로 말씀대로 살아진다고 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살라고 설교를 했다.

 

오늘날 성도들이 내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100% 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오셔서 사신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니 

자동적으로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다.

내가 노력한다고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이다.

내 안에 주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러 오셨다.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러 오셨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단순히 죄 문제만 해결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구원시켜서 거룩한 의인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한 사람 가지고는 안된다. 

지금 인구가 60억이 넘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성령 안에 주님이 영으로 오신 것이다. 

주님이 영으로 오셔서 수많은 성도들 속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영이시니까 누구에게든지 동시다발 적으로 들어가실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안다면 

율법에 대해서 왜 죽어야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성도이다.

 

언제까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가?

율법적 신앙가지고는 절대로 말씀대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셔야만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에는 

그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의로운 삶이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삶이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었다. 

말씀대로 살기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지 않았다. 

그냥 삶 자체가 의로웠고 말씀을 몰라도 말씀대로 살아졌다.

왜 그랬을까? 바로 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죄가 없는데 어떻게 죄가 나온단 말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니까 의인이다. 

의인은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러니 노력을 안해도 의롭게 살아지는 것이다. 

내 죄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9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었는가?

나를 낳은 곳은 십자가이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순간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난 자이다.

인간적으로 표현을 하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나를 잉태해서 

10개월 만에 나를 낳았다고 한다면 죄가 조금이라도 있겠는가? 

전혀 없다 그러니 죄를 지을 수 없다. 

바로 십자가에서 내가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것이 참된 복음이다.

나는 율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단순히 이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다. 

어린아이같이 믿으면 율법에 대해서 죽게 되어 자유를 누린다.

 

 

여섯 번째로 나는 ‘초등학문’ 대해서 죽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것 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초등학문은 헬라어로 

“스토이케이온” 원래의 뜻은 ‘기본 요소, 기본 원리’ 어떤 분야에 있어서 

초보적인 지식, 저등한 종교적인 지식, 이방인의 천체숭배사상이나 

철학사상이나 신화와 족보 등을 말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초등학문을 구약의 율법의식이라고 했다.

초등학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초등학문 따라 살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의 초등학문은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신앙생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방해가 되는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면 신앙인은 세상학문을 하지 말아야하나?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세상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회에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해서 사회에 도움을 주어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세상 초등학문을 내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초등학문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신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초등학문에 대해서 죽으면 세상 초등학문의 가치를 

성경보다 높게 두지 않게 된다. 

오히려 세상 초등학문이 진리에 반대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진화론이 그렇다. 진화론을 믿게 되면 창조론을 부인해야한다.

그래서 진화론이 있다는 것은 알되 창조론을 믿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초등학문에 대해서 죽었다. 아멘!

 


일곱 번째로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세상과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세상은 무엇인가?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16절에 자세히 설명을 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 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세상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 12:31)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

 

이 세상의 임금은 바로 사탄 마귀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라는 것이다.

사탄마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용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죄를 짓게 하고 주님과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마귀의 종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도 이 세 가지로 유혹을 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본즉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가 들어온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게 된 것이다.

먹음직스럽고는 육신의 정욕이요 보암직하고는 안목의 정욕이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은 이생의 자랑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안목의 정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명예와 출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질이 우상이 되어서 신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음란으로 교회가 점점 더렵혀지고 있다.

안목의 정욕은 심각한 수준이다.

지금 한국은 안목의 정욕으로 충만하다. 

인터넷과 T.V 중독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성도들의 가정가정 마다 거실과 안방에 T.V를 모셔놓고 은혜를 받고 있다.

말씀과 기도와 가정예배를 잊은 지 오래이다. 

T.V 앞에서 인터넷 앞에서 정신들이 팔려있다. 

주일날 겨우 설교 20-30분 듣고 일주일 내내 성경 한구절도 안보고 

기도하지 않고 하루에 몇 시간씩 T.V 앞에서 

세상 것들을 그대로 받아먹는다.

그러니 마음속에 세상의 육신적인 것, 혼적인 것으로 

가득한데 말씀이 들어가겠는가?

오늘날 젊은이와 어린이들에게는 컴퓨터가 우상이 되었고, 

어른들에게는 T.V가 우상이 되어서 

정성껏 섬기고 있다. 통탄할 노릇이다.

 

주일날 설교하기 전에 성령님께서 예언적인 기도를 인도하셔서 

예언적인 기도를 하면서 회개를 촉구했다. 

우상을 버리라고 강력하게 선포를 했다. 

영안이 열린 집사님 한 분이 그 상황을 환상 중에 보는데 

우상을 버리라고 말씀을 할 때에 성도 옆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데 

우상을 섬기는 성도가 예수님을 밀어버리고 

우상을 생명처럼 꼭 끌어안더라는 것이다. 

이정도로 성도들에게 우상이 심각하다.

이 우상이 주로 안목의 정욕이다.

어떤 집사님은 컴퓨터 게임에 중독이 되어서 밤새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끊지 못했다. 

그래서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컴퓨터를 교회에 6개월 갔다 놓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한 달 정도 지났는데 금단 현상이 일어났는지 

게임을 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것이었다.

그래도 안된다고 하자 집사님이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했다. 

컴퓨터를 못하게 교회에 강제로 갔다 놨다는 것이다. 

경찰에서 전화가 와서 전도사님이 깜짝 놀랐다. 

전도사님이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까 

경찰관이 이해를 잘 해서 잘 넘어갔다.

얼마나 중독이 되었으면 경찰에 신고까지 했겠는가!

 

오늘날 성도들이 컴퓨터 인터넷 과 T.V로 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 뒤에는 사탄이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옛날에는 인터넷과 T.V가 없어서 가정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었는데 지금은 우상이 세워졌다.

컴퓨터나 T.V 자체가 우상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이것이 우상이 되고 있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이것이 끊어지는 유일한 비결은 안목의 정욕이 십자가에서 죽는 길 밖에 없다.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라고 끊어질 때까지 묵상하고 선포를 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날마다 말씀을 선포해야한다.

 

이상에서 십자가에서 무엇이 죽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다.

이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이렇다.

-나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나는 ‘율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나는 ‘초등학문’ 대해서 죽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죽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나를 유혹하지 못하고 

나를 죄 짓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