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죄를 계속 짓고 있으면서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단호한 결심이 서지 않았을 때...
가령, 형제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악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악의를 품고 있다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계속 마음에 걸린다든지,
미워하는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는다든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누군가의 것을 가로채고 보상하지 않았다든지,
나의 비양심적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 손해를 입었다거나,
나의 악한 말로 인하여 형제에게 모멸감이나 상처를 줬다든지...
떨치지 못하는 비 공식적 음란한 문제가 마음에 걸린다든지...
성경적이지 않은 세상의 이런저런 것에 빠져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든지...
대략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이런 것이 해결되지 못한 내 깊숙이 있는 양심적 찔림 때문에
아무리 교회에 가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해도,
도무지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거룩한 마음이 올라오지 못합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기가 옳다 하며
바리새인들처럼 고개 빳빳이 들고 위선적인 예배를 드리겠지만,
양심이 살아있다면 이런 상태에서 온전한 예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 정상적인 분들이라면 이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이러는 이유는 아직 양심이 죽지 않고 살아있기에
자신의 양심이 이를 먼저 감지하여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고,
또한, 주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주님 앞에 부끄러워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세상 단어로 표현하면 주님 앞에 면목이 안 서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죄의 마음을 품고 거리에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양심에 거리낌 없이 뿌듯하게 보이던가요?
그러므로 사람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양심에 찔리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음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3-24절)
과거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납치범이 한 여성의 자식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이 납치범은 잡혔고 죽은 아이의 엄마는 갓 신앙인이 되었기에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여 범인을 용서하고자 교도소에 찾아갑니다.
그러나 범인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당신의 용서는 필요 없다."
납치범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여인은 살범인의 태도에 분노하여
용서하려던 마음이 한순간에 다 사라지고 이성을 잃고 소리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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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살인범은 하나님으로부터 진짜 용서함을 받았을까요?
그가 말하는 용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타깝지만... 납치범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죄 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위로받고 자유하기 위해, 보혈 피라는 것을
자기 최면을 거는 도구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북치고 장구쳐서 자신에 맞는 하나님을 임의로 만들어내
용서받았다고 스스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그걸 어찌 아냐고요?
납치범이 죽은 아이 엄마를 대하는 태도의 열매를 보면 그의 용서받음은
가짜라는 것을 누구나 다 분별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는 당연히 용서를 구하겠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 납치범이 피해자에 대한 조금의 거리낌과
미안함의 양심도 없이 주님께 회개함을 봅니다.
과연 이 회개를 주님께서 들어주셨을까요?
결단코 장담하지만... 절대 안 들어주십니다.
그 마음은 이미 회개할 진정한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께 진짜 회개하려고 했다면 피해자에 대한 마음을 헤아려
진심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참회의 눈물을 흘렸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 자체가 없었기에 죽은 아이의 엄마가 찾아왔어도
전혀 죄책감 없이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마음을 미리 아시기에
이 범인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는 영화 속의 장면이지만... 이런 장면은 우리 삶 속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것이라 이 영화 내용을 빗대어 드린 말씀입니다.
이 영화 스토리가 극단적인 비유일 뿐이지, 범위를 넓혀서 보면 사실...
이 범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흔한 모습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물을 드리려다가'에서 예물이란
헌금 같은 물질만을 표현함이 아닙니다.
주님께 참된 거룩한 마음을 드리는 것 자체를 예물이라고 합니다.
헌금은 그저 외적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단지, 진정 거룩한 마음으로 드렸는지, 거룩한 마음도 없이
율법적인 측면에서 드린 것인지의 차이만 있습니다.
회개 자체도 예물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가 주님 앞에 나서기 전
내 죄의 대상이 된 형제에게
먼저 양심의 찔림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그런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주님 전에 나왔다면...
과연 양심상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예배를 주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결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하게 회개하던 세리를 기억하십니까?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며 용서해 달라는 세리는
분명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하여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애통한 그 마음 그대로 성전에 왔기에
예수님도 인정하는 회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리가 주님께 드린 마음의 예물입니다.
그리고 이 세리는 회개 후 성전을 떠나 회개에 대한 열매로
자신이 착복한 돈을 돌려줬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앞에서...
진정 죄로부터 확 돌아서길 원하여 단호한 결심이 섰을 때
주님 앞에 엎드리면 한없이 눈물이 나오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세리 같이 마음을 찢는 애통한 회개가
주님의 만지심으로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굳게 죄를 버리려는 마음으로 주님께 굴복하려고 했을 때
비로소 애통한 기도가 터짐을 경험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어떤 불량스러운 고교생이 있었는데
다른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괴롭힘을 그만둘 마음이 추호도 없으면서 그 학생의 머리를 툭툭 치며
괴롭혀 미안하다고 능청스럽게 말합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중고교생들 사이에 실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었지만, 이런 경우 얼마나 황당한 경우입니까...
그러나 이런 경우가, 믿노라 하는 분들 중에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저 상황만 다를 뿐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죄로부터 돌이킬 마음가짐도 전혀 없이
여전히 죄를 즐기려고 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 경건한 모습을 하고
떳떳하게 주여주여 하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흔한 일입니다.
용서해 주셨거니 하면서 또 세상에 나가 죄가운데 있으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이 부르실 때 왜 숨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로 해놓고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자신들이 저지른 불순종에 대하여 주님을 볼 낯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그들을 숨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아담과 하와는 양심적이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한 부끄러운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숨어버린 아담을 주님께서는 왜 불렀겠습니까...
이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부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른 주님의 그 음성에는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며 혼내려고 부르는 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변질되기 전,
흠이 없는 순전한 그들의 원래 모습을 찾고 계신 겁니다...
그의 절대 순종적이었던 모습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의 모습은 어디 가고 너희가 어찌 이렇게 되었느냐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찾는 슬픔의 부름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용서를 구할 생각도 없이
선악과의 치명적 중독증상으로 인하여
뱀의~~ 때문에, 하와의 ~~ 때문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에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선악과의 증상으로 인해 육의 악한 속성이 들어가서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이나 하고,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며 함부로 판단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온 판단과 변명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육의 악한 속성이기에
그 누구도 에덴에서 주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쫓겨난 것입니다.
지금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여전히 애통한 회개도 없고, 회개할 마음도 없고,
세상 죄 가운데 살면서 교회만 가서 '주여 주여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이렇게 하는 행위는 위에서 예를 들듯...
불량한 학생이 어떤 아이를 툭툭 때리면서 죄의식도 없이
놀려대며 미안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이런 예배와 기도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하십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주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가복음 7장 6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1장 11-12절)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주님을 대하면 절대 안 됩니다.
이는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주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예배는 주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저 헛된 수고로 주님과 나 자신을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 회개 없는 예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서 돌이킬 마음도 없이 떳떳하게 살면서
막연히 은혜를 앞세워 내 죄를 다 뭉개려고 하는 그 악한 심리는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타는 진노에 기름만 뿌릴 뿐입니다.
회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굴복하여 회개하려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사야 66장 2절)
우리의 최초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숨었던 그에게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창조한 순전했던 아담의 모습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이 나에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회개함으로 거룩하고 순전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이 음성이
내 귀에 생생하게 들려야 합니다.
아담처럼 숨지 마시고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의 치명적 중독증상으로 인하여
주님께 용서를 구할 마음도 없이
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사람은 연약해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하며 은혜를 앞세워
변명으로 일관하며 죄를 감추려 하지 마시고,
애통한 세리의 모습으로 솔직하게 주님께 나오십시오.
주님은 지금도...그 모습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애통하고 간절한 회개만이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온전한 회개만이 선악과의 중독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