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과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구분하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선물인 성령을 제자들에게 소개해주셨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큰 근심과 걱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에서 출교 당하고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그들은 정말 의지할 곳이 없는 소위

‘낙동강 오리 알 신세’ 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말씀하시며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그 성령님의 직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며 그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희망을 고취시키려고 힘쓰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 중략 …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진리의 영인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심과 우리 속에 내주하심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함께하심은,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고 도와주시며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감화 감동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목마르고

갈급한 심정을 주시며 필요할 경우 여러 은사들도 주십니다.

 

  내주하심은, 성령님의 역사가 내 안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안에서 성경말씀인 진리를 통해 매일 매일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 진리에 순종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과 그

진리가 내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성령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머물며

자기 생각대로 삶으로써 성령님의 내재하심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옵니다.

성령님이 함께 했으나 그 성령님을 소홀히 여긴 사울 왕, 기드온,

예후, 아나니와와 삽비라 등등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인도와 감화를 받은 많은 이들이 주여 주여!

하며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축사하는 등 여러 은사를 받았음에도

그 자리에 머물며 아쉽게도 성령님의 내재하심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직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을 추구하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재미있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주님이 주시는 갈증을 해소하는 생명수

곧 성령님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 7:38-39)

 

  “애굽(세상)에 있을 때가 재미있었다” (민 11:18)

우리는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그들처럼 세상에 미련과 집착을 가진 오염된 마음 속에

절대로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령 받기를 원하지만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찾고 구하려는 목마르고 애통한 마음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세상과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로 온전히 돌이키려는

단호한 회개의 결단이 없는 사람 속에  결코 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문을 열지

않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계 3:20) 그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밖에는 없고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성령님의 내재하심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로 진리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님이 직접 내 속에 내재하여 역사하심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주님의 생각과 사상과 거룩한 품성을 닮아가야 합니다.(거듭남)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우리는 위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을 영접한 것이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면 내 안에 성령님이 이미 내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고전 12:3, 요일 4:15) 그것은 잘못된 복음입니다.

 

 ‘시인하다(호모로게오)’ 라는 단어는 단지 입술만의 고백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시인하는 것은

곧 재산몰수는 물론이고 돌에 맞거나 톱으로 켜는 끔찍한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 11:36-38)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 “성령을 받으라!” 명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 도망가고, 한 명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

하던 연약한 제자들이 변화되어 복음사역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변화 받아 온전해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의 성령을 받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다시 한번 더 말씀 드리자면, 우리는 주님께서 명하신 성령을

받아 거듭나 새롭게 변화되는 경험이 있어야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들과 나를 부인하고 온전히 주님께

돌이키려는 진정한 회개의 결심이 요구됩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는 수준에서 안주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 올인 하기로 결단하여, 성령님의 내재하시는 은혜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