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시 34:18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며,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심지어 시편 51편 17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마음이 상한 자를 이토록 찾으실까요?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예수께 택함 받은 자는 당연히 세상이 미워해요.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자니
현실이 어떨까요?

하나님이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는데, 여기서 ‘충심으로
통회하다’라는 표현은 원문으로는
‘영이 부러졌다’라는 뜻입니다.

왜 영이 부러지겠어요?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자니 어떻게 마음이 안 상하고,
영이 부러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가까이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거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녀로 의롭게 됩니다.

이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하지요.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우리 삶이 한순간
거룩하게 바뀌던가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변화가 시작됩니다.
바로 예수님 닮아가는 삶을 살기 시작해요.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그때,
우리는 영과 육체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구원의 완성인
‘영화’(Glorification)를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하는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바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를
누리는 걸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에 있어
예배가 주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지요.

성숙한 예배는 찬양의 전문성과
설교의 탁월함으로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게 사실이지만, 교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은혜의 ‘동기’(動機)를 갖고 있어야 해요.

성도의 삶에 흐르는 하나님을 경외한 흔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성령의 위로로 가득 채우시는 예배가
우리의 예배여야 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지금 우리의 예배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삶을 살아낸 흔적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의 위로도 한계를 보일 수밖에요.
아무리 탁월한 설교자와 훌륭한 찬양팀으로
예배를 채워도, 한계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위로가 먼저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먼저일까요?

마치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묻는 것처럼 들리지요?

하지만 답이 있습니다.
성령의 위로가 먼저예요.

먼저는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예배를 통해
성령의 위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의 위로로 얻은 힘으로
세상에서 하나님 경외하는 삶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럴 때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와서 경험하는
성령의 위로가 더욱 크고 깊게 임합니다.

또한 그 은혜로 다시 힘을 내어
세상에 나아가는 거지요.

은혜의 순환!
이것이 우리의 예배와 삶에 함께하며
예수님을 더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게 합니다.

예배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건 불가능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없이는 예배의 은혜 또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 동안 광야에서
철저하게 예배 훈련을 시키셨겠어요.

왜 예배를 강조하셨겠어요.
예배가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온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온전하게 설 수
없기 때문이에요.

예배가 온전해질 때,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걸음을 걸어냅니다.

자기 삶을 하나님을 대신하는 삶으로 채우려면,
처음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과 실수가 따를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고, 약속하시지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어디서 쉼을 얻고,
어디서 위로를 경험하겠어요?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와 삶이 균형을 이루며 성장하는 거지요.

예배 가운데 경험하는 성령의 위로 없이
내 의지로 하나님을 대신하며 살려고 하면
반드시 한계를 만납니다.

또한 예배 가운데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세상에서 하나님 경외하며 살기를 외면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성도로서 직무 유기예요.

하나님이 힘주셔야 할 이유와 명분을 상실한 예배,
삶으로 흘러가지 않는 예배는 오히려 성도를
병들게 합니다(이 내용은 후에 더 구체적으로 나눌게요).

예배의 진정한 연료는
삶의 순종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령의 위로를 누리는
은혜의 순환이 우리 교회와 삶에 가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