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과 온전이란 단어의 차이는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구조의 형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벽이란 말은 주님 외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의미이기에 주님으로부터 피조된 모든 만물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대상으로 완벽이란 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는 100% 절대적 법칙입니다.
온전이란 말은 완벽이란 말과는 전혀 다른 영적 의미로서 온전은 주님의 기준에서 사람을 보고 사용하는 의미이고, 완벽이란 말은 사람 기준에서 주님을 섬기며 사용하는 뜻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잘못 혼용하면 완벽과 온전이란 말을 동일어로 잘못 사용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주님 말씀에 완벽하게 따를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전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완벽히 지켜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성경 그 어디에도 믿는 자들에게 완벽한 자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기준에서... 완벽과 온전은 동일어가 아님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완벽이란 말 대신 온전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온전하라는 말씀을 어떤 기준으로 하셨는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장 8절)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장 12절)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시편 37장 18절)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잠언 11장 20절)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온전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사도행전 13장 22절)
위 말씀 외에도 온전이란 말씀은 성경 수십 군대에 기록됩니다. 위 말씀을 보면 욥이 사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완벽한 자였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원망도 했고 자신이 의인이란 교만도 있었습니다. 노아는 사람의 기준으로 완벽한 자일까요? 그 역시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어 이를 본 둘째 아들 함의 자손들이 저주의 길로 가는 원인 제공을 먼저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사람의 기준으로 완벽한 자였을까요? 그 또한 우리아의 부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춘정이 동하여 남의 유부녀를 범한 것도 모자라 이를 덮고자 그의 남편인 우리아마저 전쟁의 맨 선봉에 세워 간접 살인까지 했던 자입니다. 그뿐입니까... 계수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을 어기고 교만하게 계수하는 불순종으로 주님의 진노를 사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 진노의 대가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대충 봐도 이들은 완벽은커녕 온전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모두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고 온전한 자라 칭하시며 이들을 종으로 크게 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대체 왜 이들을 온전한 자라며 칭찬까지 하셨을까요... 주님은 이들의 겉으로 표현된 모습을 보신 게 아닙니다. 그들의 심장속에 자리잡은 속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이들도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났는데 완벽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자라 칭함을 받은 이유는...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뜨거운 마음이 강했고, 간혹, 주님의 말씀을 못 지킨 자신의 죄에 대하여 분명히 인정하고 진정으로 애통하게 회개할 줄 알았고 그 악한 모습에서 늘 떠나려는 거룩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위 세 명을 예로 들었지만, 말씀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늘 이들과 동일한 모습이 항상 보입니다. 바울 역시 그러한 모습이 매우 강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모습을 귀히 여기고 온전한 자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보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전하다고 칭찬하십니다. 사람의 기준과 주님의 기준이 분명 다르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알듯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완벽하게 지키겠습니까... 주님의 기준으로 하여 보시듯 온전히 지키라고는 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신명기 30장 2절)
사람의 기준에 근거하여 주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은 이 땅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지키려는 사람은 그 수가 적으나 분명히 있습니다. "에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다 지키나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데 주님 말씀을 못 지켰다고 그게 무슨 큰 흠이 되나 그러니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 이렇듯 인간의 생각을 잣대로 기준 삼아 완벽하게 될 수 없다고 핑계하여 주님의 기준인 온전할 생각도 없이 막연히 은혜 안에 기대어 자신의 죄를 가리려는 그런 모습은 완벽한 자도 온전한 자도 아닙니다. 육적인 모습을 정당화하고, 그런 자신에 대하여 막연히 은혜로 '퉁'치려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죄의 길에 참여하는 자일 뿐입니다. 애초에 이런 마음이 있기에 회개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핑계하여 죄를 당연하게 여기는데 무슨 애통함이 있어서 진정한 회개가 나오겠습니까... 은혜를 자꾸 앞세우는 심리를 뜯어보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정당화하고 감추기에 회개하고 돌이켜 개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심적 증거입니다. 은혜라는 의미는 내 죄를 가리고 덮고 정당화하는데 이용되는 도구가 아님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는... 내가 죄 되고 연약한 자이므로 주님의 말씀에 다 순종 못 하기에 부끄러워 용서를 구하도록 간절히 회개하게 하심이고, 내가 부족하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능력을 구하는 것... 그 능력을 베풀어주심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간절한 회개도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은혜가 절대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저주입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의 길에 서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께서 무조건 용서하시겠습니까? 다만, 살아 호흡하는 동안은 죄인인 우리에게 계속 돌아오라고 하시며 70번씩 7번이라도 무한적 용서하시지만, 육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에는 죄의 대가에 따라 아주 냉정하게 심판하시는 공의의 주님이십니다. 사실, 그게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애통한 회개도 없이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고 핑계하여 은혜로 자신의 죄를 '퉁'치려는 사람들은 살아 호흡할 때는 문제 없겠으나, 호흡이 멈추는 그 날... 절대 자비가 없는 주님의 공의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짜 온전한 자는 주님 뜻대로 살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고 주님 앞에 복종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게 안 되기에 주님 앞에 나아와 다윗이나 세리처럼 마음을 찢으며 눈물로 간절히 회개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전한 자의 전형적인 모형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왜 하겠습니까... 기도는 분명 그 이유와 목적이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주된 목적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능력(은혜)을 구함이 주된 목적이고, 그 응답에 대한 기쁨을 감사로 주님께 표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감사의 기도를 안 하면 안 됩니다. 응답이 없다는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응답이 없는 것이니 그 자체도 이미 응답입니다. 그래서 능력의 은혜를 구하는 것과 감사의 기도는 항상 쉬지 말고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렇듯 영적인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진짜 은혜의 뜻을 제대로 집지 아니하고 자신의 죄를 은혜를 앞세워 '퉁'칠 목적으로 잘못 남용하면 은혜 안에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 밖의 죄 가운데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앞세워 내 죄를 가리는 도구로 사용했다가는 주님의 진노에 놓이게 됩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은혜를 아는 자는 은혜로 죄를 가리지 않고 간절하고 애통한 회개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이 온전한 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바람이시고 주님의 기준에서 온전한 모습입니다.
사람들 중에 완벽한 자는 이 땅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흰옷을 입고 밖에 돌아다니면 분명히 점과 흠이 묻어 더러워집니다. 그렇다고 "그것 봐라!!! 매일 입는 옷이 어찌 깨끗할 수 있느냐"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판단입니다. 점과 흠을 없애는 게 바로 옷을 세탁하는 일입니다. 옷을 세탁하면 되는 일입니다. 옷을 세탁하여 깨끗하게 할 마음이 없으니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즉,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회개할 마음이 없는 겁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기에 세상에 사는 한 언제라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애통한 회개의 은혜는 그래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늘 회개하는 자는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늘 회개해야 내 죄(점과 흠)가 사함을 받아 깨끗해짐으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마귀가 없는 곳이라 우리의 영에 점과 흠(죄지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늘 깨끗한 세마포로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일이 없습니다. 그곳은 이 땅에서 이미 회개한 성도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두 종류입니다. 육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가기(거듭남) 위해 회개하는 것과 거듭난 성도라도 다윗처럼 육을 입고있는 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또 매일 회개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가짐과 온전히 순종을 못 해 애통하게 회개하려는 이 마음가짐이 주님이 보시는 온전한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48절)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 스스로는 절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위 말씀은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후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온전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나는 진정 온전한 자입니까? 온전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육적 죄 된 모습을 미워하고 그것에서 돌이켜 간절히 회개하며 주님께 철저히 굴복하십시오. 그 순간 주님께서는 나의 죄를 보혈 피로 사해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 온전한 자의 뼈대를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려고 함에 인하여 온전한 자로서의 영적인 강한 근육을 붙여주셔서 주님 곁에 가는 그 순간.... 일생일대 느끼지 못한 뜨거운 기쁨의 눈물이 흐르며 모든 구원의 여정이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전한 성도가 누릴 보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