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이 참 중요하게 쓰입니다.

그릇이 없었다면 이만저만 불편하지 않을 겁니다. 

하여, 그릇은 반드시 있어야 하기에 없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그릇의 쓰임새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릇을 만들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릇 만들기에 합당한 아주 고운 흙이 있어야 합니다. 

토기 장인들이 그릇이나 옹기 만드는 걸 유심히 지켜본 적 있습니다. 

일단 고운 흙을 퍼다가 물에 풀어버린 다음 휘휘 저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곱게 가라앉은 흙을 따로 골라내어 

밀가루 반죽하듯 손으로 뭉친 후 나무로 만든

빨랫방망이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계속 골고루 쳐댑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흙을 넓고 큰 용기에 넣고 발바닥으로

계속해서 골고루 문대는 걸 봤습니다. 

이는 기포층을 없애기 위해 하는 조치라고 합니다. 

그 후 수분이 날아가지 않게 며칠 동안 충분히 숙성시킨 다음 

비로소 그릇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다고 합니다. 

그릇 만드는 장인은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집중하는지 

옆에서 누가 불러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흘러내리는데 얼마나 멋있게 보이는지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존경심마저 들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우리는 고운 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궤계로 인하여 동산에서 쫓겨난 후 

우리는 죄 가운데 놓인 아주 단단한 돌덩이가 되었습니다. 

이런 돌덩이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여기저기 나뒹구는 쓸모없는 돌일 뿐입니다.

이 돌덩이가 흙이 되려면 깨진 다음 부서지고 그 이후

입자가 고운 흙이 되어야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합당한 재료가 되어야 토기장이이신 주님께서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내 이생의 자랑, 

내가 쌓아 올린 명예의 바벨탑,  

내 육신의 자아,

내 육신의 욕망,

내 육적 자존심,

내 교만한 마음,

죄로 물든 나 자신... 

모두 깨지고, 부서지고, 내려놔야 그릇이 될만한 고운 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지고 부서지는 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절대 안 됩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것조차 주님께서 손을 대셔야 역사가 이뤄집니다. 

그럼 그냥 나태하게 어떻게 되겠지 하며 가만히 있으면

주님께서 다 알아서 깨주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깨주시고 부셔달라고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장 12-13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17절)

 

부서지고 깨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적 고통이 동반됩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없으면 결코 쓸만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돌덩이가 흙이 되기까지 이리 굴려지고 저리 굴려져서

깨져갑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고난이 없이 고운 흙으로 변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 똑똑했던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리 깨지고 저리 깨져서 

80세가 돼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요셉도 노예 생활의 고단함과 억울한 모함으로 지하 감옥에서 십수 년을 

지내면서 비로소 애굽을 다스릴만한 총리가 되었습니다. 

부서짐이 없는 작품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우리는 이들을 말할 때

그들이 받은 풍성한 축복만을 말하기 즐겨할 뿐이고, 

교회에서도 설교할 때 그분들이 받은 축복만을 설교할 뿐,  

그 뒷면에 숨어있는 깨어짐의 은혜에 대해서는 말하길 꺼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축복받는 것은 환영하지만,  

깨어짐을 원하지 않고 세상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이 받은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뒷면에 숨어있는 깨어짐의 은혜가 훨씬 더 값진 것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짐 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요셉이 누린 총리의 모습만 은혜라고 할 뿐,

그 뒤에 숨어있는 깨어짐의 고통은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 그게 진짜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깨어짐이 없는 회개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어짐이 없는 거듭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어짐이 없는 겸손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함이 없는 십자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 없는 죄 사함의 보혈 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숴주시고 더욱 다듬고 어루만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간절히 주님을 구하고 찾는 것이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여, 고난이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지금 내게 깨어짐의 아픔이 진행 중이라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만지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큰 은혜이기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시지 높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하나님이시지 교만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애통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자의 하나님이시지 

육의 것을 내려놓지 않고 나태하게 감나무 아래 누워

어떻게 되겠지 하며 입만 벌리고 있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런 분들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만지시는 역사가 있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직접 찾아와 병 고침을 구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먼저 찾아가서 병 고침의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다.

소경 바디메오, 문둥병자들, 혈우병 걸린 여인,

부하의 중병이 안타까워 예수님을 찾은 백부장...

그리고 주님 만나기를 갈급했던 삭개오...

심지어 가출한 탕자마저도 찾아오길 학수고대하셨습니다. 

이들 모두는 주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았을 때 

어루만지고 품어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세상 것을 누리면서 주님이 어련히 알고 찾아오셔서  

은혜로 구원시키겠지, 안심하며

뜬구름 잡는 막연한 은혜 주의에 기대는 분들은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라고 하셨지

알아서 찾아간다고 하시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17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중략)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9-13절)

 

깨어짐의 은혜는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나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지고 부서질수록 때로 찌든 옷이 희게 변해가는 것이고,

천국에 한 걸음 더 다가감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반드시 깨고 부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거듭난 분들의 뒤안길을 살피고 물어보십시오.

그분들이 깨어짐의 과정을 눈물로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를 깨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천국 백성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고 더욱 기뻐하십시오. 

 

시간이 지난 먼 훗날...  

그 깨어짐의 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혜의 시간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고 확인할 시간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는 때로 찌든 더러운 몸을 깨끗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과정입니다. 

때를 벗기는 과정(거듭남의 과정)은 힘들어도 

거듭나 흰옷으로 입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짐의 앞으로 과감히 나아오십시오. 

나아왔으면 주님께 모든 것을 일임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다듬으실 때 내가 생명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분들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