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성경에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이미 죄를 범함)" (마태복음 5장 28절) 

 

주님을 믿노라 하는 어떤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앞에 눈으로 보기에 관능적인 여성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 여인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상상을합니다. 

여기까지는 이 두 사람의 행동이 똑같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이런 상상은

원래 인간의 본능이라 별 대수롭지 않다며, 죄로 생각 안 하게 됩니다. 

위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이 크게 와닫지도 않고, 참 가볍게 보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죄의 덩어리임을 핑계 삼아 

'이런 악한 죄성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기에, 주님 은혜(?)가 필요하고... 

오직 믿음만이 중요하다.' 이렇게 자기 죄성을 스스로 합리화시킵니다. 

이런 편리한 생각이 바로 이시대 교인들의 심풀한 관념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미래에도 꼭 이런 사람들이 있을 줄 미리 알고, 이렇게 전함을 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장 1-2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6장 15절) 

 

위 말씀은 은혜를 빙자하여 슬며시 죄 안에 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 육의 속성을 애통해하지 않고, 은혜(?)를 슬쩍 들이밀어 

자기 죄를 어물쩍 뭉개며.. 슬며시 넘어가고자 하는 핑계의 표현입니다. 

즉, 믿음(?)과 은혜만 앞세워 자신의 죄를 감추며 구원만 받아보자는 

악한 편의주의가 숨어있습니다. 

사실, 의도적으로 죄짓는 사람보다, 이렇게 은혜를 앞세워 죄짓는 자가 

더 악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자기 죄을 위해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리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육신의 요구대로 합리화해도 주님은 

그 속 마음의 동기를 등불처럼 살피시기에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보느니라" 

(사무엘상 16장 7절)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언 20장 27절)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상상을 괴로워하며 

자기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양심의 찔림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보혈의 은혜로 자신의 눈을 씻어달라 하며, 애통히 회개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려는 간절함이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이 두 부류 사람이 가는 길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개념에 대하여 

전자는 자신의 죄를 가리는 도구로 악용한 사람이라 죄를 가벼이 여겨 

양심의 큰 찔림도 없이 죄와 적당히 타협하는 넓은 길을 달릴 것이며... 

삶에서도 변화됨이 없기 때문에 거룩의 모습은 없고 육의 모습을 

계속 쏟아내며 믿음의 교리만 붙잡고 아까운 세월을 낭비할 것입니다. 

참으로 그 마음을 계속 품고 있다면 그는 절대 변화 받지 못할 것이며 

그 종착역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죄 앞에 무너지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애통하고 상한 심령이 되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제발 살려달라 

갈급히 주님께만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님의 은혜로 변화 받아 생명의 좁은 길을 걸어갈 것이며 

그 종착역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어쩔 수 없으니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며... 내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그저 솔직하고 겸손히 굴복하며 내 능력으로 불가능하니, 도와달라며 

애통히 마음을 찢는 자를 매우 기뻐하십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언 3장 34절) 

 

선악과로 에덴에서 쫓겨난 우리들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이 세계에서 같이 공존하는 한... 

죄를 전혀 범하지 않을만한, 완벽한 영성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완전한 심령 상태는... 

죄의 유발자인 마귀가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우리가 이 땅에서 호흡하는 한... 

주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의지하며 따라가느냐에 따라 

그 끝이 멸망이냐 생명이냐로 틀림없이 갈라질 것입니다. 

 

윗글은 죄의 한 예를 들어 말씀드린 것이지만...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느끼는 죄의 속성들이 

종류와 모양만 다를 뿐... 

그 본질은 모두 똑같은 것임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죄 가운데 살아가며,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내 의지로 벗어나려 해도 안 된다는 것쯤은 본인들도 잘 알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씀이고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윗글에서 표현했지만... 구하는 은혜의 동기가 다르듯 

은혜의 본질에 대해 어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끝의 결과들이 분명히 

달라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간략 정리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죄 안에 살아가며, 내 죄에 대한 애통한 마음이 왜 올라오겠습니까... 

내 의지와 힘으로...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안 되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한계에 직면하게 되고, 그 좌절감 때문에  

의에 굶주리고, 가난한 심령이 되며, 목말라하게 되고, 가슴을 치며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붙잡으려고 생겨나는 영적 현상입니다. 

그게 바로 상한 심령이고 주님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은혜로)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중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은혜로)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6절) 

 

그런데... 

도무지 죄는 어쩔 수 없다 하며 죄를 합리화해 타협하고 

태만하게 은혜로 퉁 치려는 사람에게는 전혀 양심적인 찔림이 없는데 

상하고 애통한 심령이 들어서겠습니까? 

성경에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 했는데, 그런 맘이 들어서겠습니까? 

절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딱딱하고 냉정한 심장만이 힘차게 고동칠 뿐입니다. 

은혜라는 단어의 발음은 똑같아도, 마음의 동기여부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 

마귀가 주입하는 은혜는 육을 죽이지 않고 죄와 타협의 길을 가게 하여 

영을 멸망시키는... 은혜의 가면을 쓴 방종의 권리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입하는 은혜는.. 악한 육의 속성으로부터 출애굽 하게 하여 

결국,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은혜는... 

하나님께서 융통성을 발휘해 방종하도록 승인해주는 허가증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의 좁은 길을 가도록 능력 주시는 것이 참된 은혜입니다.   

우리는... 방종의 허가증(값싼 가짜 은혜)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육의 속성을 죽이고, 내 영을 살리는 능력(참된 은혜)을 구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걸...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애통하고 상한 심령이 되어 주님만 바라보며, 갈급히 구하려는 심령을 

주님은 외면치 않고 반드시 품어주시며, 그것이 또 주님의 요구입니다. 

부디, 찔림이 있는 애통하고 상한 심령이 되십시오. 

 

"상한갈대(상한심령)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이사야 42장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