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육의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 

생각으로나마 참 힘들겠구나 할 뿐,  

실제 그 사람의 진짜 고통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실제 그 고통을 겪어봐야 그 사람의 진짜 고통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남들이 물질로 가난하여 힘겨워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그저 참 힘들게 사는구나 생각만 될 뿐,

실제 가난한 사람의 진짜 어려움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실제 그 가난을 겪어봐야 그 사람의 진짜 어려운 마음을 알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높아지려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을 볼 때 

참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 뿐, 

실제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실제 겸손한 사람이 되어봐야 진짜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이웃을 위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은 참으로 사랑이 많다는 생각만 들 뿐,

실제 그 사람의 진짜 사랑을 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실제 사랑하는 위치에 가봐야 진짜 사랑이 뭔지 알게 됩니다. 

 

누구나 모두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고 단호히 주장합니다. 

진짜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증명돼봐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상상하며 참 아프겠다 라고

생각은 들지만, 진짜 그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막연히 바라봄이나 읽어봄의 생각속에 갖혀서

간접적으로 그런가보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는 육의 감정 즉 혼으로 느끼는 것들로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남들의 가난이 내 가난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남들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이 진짜 내 고통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내가 실제 겸손하여 더욱 낮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여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지고 

감싸려는 마음이 들 때 실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 주님을 위해 내 목숨까지도 버리려는 마음이 들 때 

비로소 진짜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생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고통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론과 지식과 감정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실제상황입니다.

영으로 실제 느껴야 예수님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은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 때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은 부득불 저의 개인적인 간증이지만... 

언젠가, 주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을 어찌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서

주님께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제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며칠 동안 아주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중 엄청난 무게감과 가슴을 쥐어 짜는듯한 애틋한 통증이 가해지며

주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데 도무지 감당이 안 되어 

이제 알았으니 제발 그만하시라고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습니다. 

엄청난 긍휼의 마음이 제게 전해지는데 도무지 감당이 안 되어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홍수가 되어 나오고, 

제 입에서는 이제 제발 그만 하셔도 된다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제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제게 맛보기의 사랑만 보여준 것이 그정도였습니다.

왜 주님께서 감당할만하게만 달란트 혹은 연단을 주시는지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말로 무지막지 했습니다.  

 

그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얼마나 강했던지 

인간인 저에게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내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으로

느껴질 줄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그저...

그냥 '측은한 마음이 들겠구나'라는 생각으로 기대했을 뿐,  

그런 정도가 아니라 진짜 무게감으로 느껴지는 사랑의 마음이 

오히려 고통과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인간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제가 성령님을 받은 후인데도 

제가 뭔 욕심인지, 교만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감정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어졌기에 

그리 기도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제가 교만했던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기꺼이 목숨까지 십자가에 달려 내어 주시면서까지

그 사랑을 증명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주님을 믿노라 한다면... 

우리가 진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어떤 환란의 순간이 와도 주님을 증거하게 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상황에 따라 내 입장이 바뀐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함도 아니오, 믿음은 더더욱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알면 

그 핏값을 제대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육의 부모가 나를 살리기 위해 내 죄 때문에 대신 목숨을 잃었다면 

과연... 죄짓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와~ 우리 부모가 내 죄를 대신해서 목숨을 잃었으니

이제 나의 모든 미래의 죄까지 무마되었기에 이제는 죄지어도 될까요?

이런 자녀가 있다면 부모가 대신 치른 죗값을 쓰레기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진짜 깨닫고 동참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그 누구도 감히 죄지을 생각을 못 할 것입니다. 

 

믿노라 하는 사람 중에...  

'사람이 어찌 죄 안 짓고 사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심적 동기는 

 내심 거룩의 마음 없이 육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거부하지 않으려는 핑계이자, 불편한 진실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영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생각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언제라도 목숨을 위협받는 환란의 시대가 오면

내 목숨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기에 얼마든지 배신하고

외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부담이 없으니 자신만만하게 목숨을 버린다고 하겠지만, 

주님은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기에 이미 다 아시고 계십니다. 

사람은 속여도 주님은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것...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것... 

그리스도의 보혈 피를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거듭남 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야만

그것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내 이웃을 위하여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의 뜨거운 보혈 피가 내 몸에 흐르는 실제 기분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매달리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그리스도의 뜨거운 십자가 보혈 피가 내 몸에 흐르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정말 애통하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간절히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불로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장 12-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