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벵이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일종의 
"탈바꿈"(metamorphosis)이라고 할 정도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이 없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걸맞게 
"패러다임 천이(paradigm shift)"를 
이룰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보는 시각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지금 보고 있는 이 종이에서 나무와  구름을 봅니까? 
인간의 거친 숨소리와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 소리를 듣습니까?
엉뚱한 소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요.

이상스런 질문이라 반문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종이가 있으려면 나무가 있고, 
나무가 있으려면 비가 있고, 
비가 있으려면 구름이 있어야 하죠.
지금 들고 있는 이 종이에는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나무가 있고, 
나무에서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가 있답니다. 
그 뿐입니까?
햇빛도 있고, 흙도 있고, 공기도 있답니다. 
종이를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 공간이 있지요

거친 숨소리를 몰아치며 나무를 베는 벌목꾼이 있지요.
그리고 운반하는 이들, 종이를 만든 사람들, 
그 사람들의 부모, 이런 사람들이 먹은 밥, 
밥을 생산한 농부들, 농부들이 쓰는 농기구, 
농기구에 필요한 쇠붙이를 캐낸 광부들...
결국 이 종이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삼라만상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종이는 결국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지고, 
종이의 종이 됨은 전적으로 종이 아닌 것에 의존해 있답니다. 
이처럼 탈바꿈(metamorphosis)은 
감지하지 못하는 속에서 여전히 진행되지요.

예를 들면,  
어린이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요인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부모가 없으면, 친구가 없으면, 햇빛이 없으면, 
공기가 없으면 나는 어린이일 수가 없지요.
어린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 때문이죠.
이처럼 나를 포함하여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이 
이렇게 서로 "어울려" "더불어" 함께 "맞물려" 
상호의존(相互依存) 내지 상호혜존(相互惠存)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야말로 '인간'(人間)이랍니다.
다른 것이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찾는 존재들이라 하겠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특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이렇게 서로 어울려 있음, 
더불어 있음을 체감하고 거기에 따라 살라는 것도 
해당된다고 생각하지요.

서로 이런 불가분의 관계를 체득할 때 
우리는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게 된답니다.

영어의 자비라는 단어 'compassion'은 
서로(com) 아파함(passion)이라는 뜻이지요.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마음이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기독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복 빌고 
복채 비슷한 것을 걷어들이는 것이겠습니까?
"믿습니다"만 복창하여 
내 개인이나 가족만 복을 받으면 된다는 
"복받는 비결"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이것도 어느 사람들에게는 필요할 수 있지요. 
그러나 오늘처럼 인간관계가 뒤틀려 살벌한 세상에, 
오늘처럼 자연을 함부로 대하므로 
인류의 공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이 정도에만 그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의 긴박한 상황에 책임을 느끼며 
이 시대의 절실한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기독교라면 
사람들에게 사물의 더 깊은 차원을 보도록 도와주는 일, 
그리하여 만물이 이처럼 서로 어울려 있다는 실상의 세계를 
깊이 자각하도록 도와주는 일에 앞장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런 자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실천하며 사는 
'기독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는 사람들이라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