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개복숭아가 약효로 인하여 각광을 받는 시대지만,

제가 어린 시절 개복숭아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딱 일반 큰 복숭아의 씨앗만한 크기이고 맛도 써서 먹기에는

그리 적당한 것이 아닙니다.

개살구도 빛깔은 아주 깨끗하고 유혹받을 정도로 선명한 노란 색인데 

딱 매실 크기와 똑같고 모양도 매실과 구분이 잘 안 됩니다.  

무더울 때 개살구 몇 개 먹으면 설사합니다. 

이 두 열매는 개도 안 먹는다고 해서 '개'자가 붙었습니다.


이런 개복숭아 가지를 다른 큰 복숭아나무에 접붙이면 

기존의 개복숭아 고유의 특성은 사라지고

아주 맛있고 품질 좋은 큰 복숭아가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자잘한 머루도나무도 일반 포도나무에 접붙임 하면 

맛있고 알이 굵은 머루포도가 열립니다. 

때깔만 좋은 개살구도 참살구 나무에 접붙이기를 하면

기존의 개살구 고유의 특성은 사라지고

참살구 정도 크기의 맛있는 살구가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무 열매들도 이런 식으로

같은 과의 과일나무들과 접붙임 하면 

아주 크고 훌륭한 과일로 재탄생 한다고 합니다. 

이는 본체가 되는 나무의 고유한 특성이

접붙임 받은 나무로 계속 주입되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창조 원리인 동시에 

이런 현상을 보고 깨달으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 20절) 


피조된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접붙임 당하면 훌륭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어떤 열매입니까... 

성령의 아홉 가지 성품의 열매입니다. 

마치 접붙임 당한 개복숭아의 특성이 사라지고

본체인 큰 복숭아나무의 특성이 생기듯

내 안에 성령님이 임하셨으니 당연히 나의 옛 기질은 수그러지고  

성령의 성품이 나를 통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의 성품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입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이렇게 위 말씀에 나타나듯 주님의 거룩한 성품이 나를 통하여 

있는 그대로 나의 평소 삶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접붙임 당한 나무가 본체 나무의 특성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원래 작고 쓴 열매를 맺던 나무의 특징이 수그러지고 본체가 되는 

큰 나무의 특성이 나타나 큰 열매를 많이 맺듯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억지로가 아닌, 아주 자연스럽게

그 특징이 나타나므로 결코, 감출 수 없고 금지할 수도 없습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듯 주머니 속에 감추어진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반드시 그 본색이 나와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믿음의 성장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성령님의 아홉 가지 성품이 그 안에 자리 잡으니  

당연히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니

불쌍한 내 이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고 돌보게 되며, 

세상적으로 보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자를

성령의 성품으로 인하여 용서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며, 

세상적으로 보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성령의 성품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던 내게 온유한 마음이 생기며, 

늘 주변을 영적 기쁨으로 꽃피우고자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게 되고,    

세상의 유혹에 참지 못하던 내 마음이 변하여

강한 절제와 인내심이 생기며, 주님께 더욱 충성하게 됩니다. 

또한, 말 한마디라도 상대의 영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걸 알기에 

범사에 항상 조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매우 겸손하고 교만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 접붙임 당하면 

이런 모습은 늘 일상적인 모습이 됩니다.

이는 내 본성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내 옛사람을 여러 방법으로 소멸시키고 주님의 속성이 

스며들어 새사람을 입혔기에 가능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


즉, 이런 성품을 지닌 사람이 천국에 합당한 백성이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육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결코, 천국에 합당한 영혼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여,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이렇듯 성령으로 거듭남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신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 카페와 블로그를 드나들며, 

설교를 듣고 신앙 글을 읽겠습니까...

내 영혼을 구원받아 사랑하는 주님과 천국에서 영생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거듭남은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필수입니다.

거듭남을 건너뛰고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의 방법도 알려주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뜬구름 잡듯  

거듭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거듭나는 방법에 대하여 성경에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17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은 4장 17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장 34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중략).........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9-13절) 


거듭남의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시지 않고 거듭나라고 했다면 

거듭나지 못해도 핑곗거리라도 있겠지만,

분명히 거듭나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거듭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핑계할 명분이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변명)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장 22절) 


성경 좀 읽거나 연구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라고 해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만 주님을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이방인과 같으면서 입술로만 구한다고 구해지지 않습니다.

마음과 육으로는 열심히 거짓말하고, 교만하고,  

남들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면서...   

입술로만 주여주여 주시옵소서 한다고 구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문을 외우는 중언부언일 뿐입니다.

이는 성령을 구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이 

이런 육신의 구습을 포기(부인)할 마음이 없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분노의 욕구가 올라와도 부인하려 해야 합니다.  

판단 정죄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도 부인하려 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도 부인하려 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람이 자신의 악한 모습을 바라보며 

애통하며 부인하려하는 모습을 은밀한 중에 살피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려는 사람을 귀히 여겨 은혜로 도우십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성령님을 구하려는 사람의 동기적 모습에 

그쳐야지 이런 모습 그 자체로 구원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행위 구원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동기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태만하게 세상 흐름대로 살면서 입을 열어 은혜만 외친다고 

성령님을 알아서 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식에 의하여 자동으로 거듭나게 해준다면 

이 세상 교인들은 모두 거듭났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육의 삶에 심취해 자신을 부인하려하지 않으면서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마음은

영적으로 게으른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늘 그런 마음으로 은혜로 어떻게 되겠지 막연히 믿으며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다가 결국, 

끝끝내 이방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시간만 허비하며 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도 못한 채 

종교 생활만 하다가 그대로 육의 장막을 벗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주님에 대한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갈급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그런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마음속의 동기를 철저히 감찰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 42편 1-2절)


주님은 놀랍게도 피조된 사람들이 거듭나는 시스템을 이미 

창세 전에 다 계획하시고 또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거듭날 수 없게 창조해놓고 거듭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다 마음만 먹으면 거듭날 수 있도록 창조하셔놓고  

거듭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니, 창세 전에 이미 지옥갈 자와 

구원받을 자를 정해놨다는 교리만 의지하며 핑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런 핑계로는 공의로운 주님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거듭날만 하게 창조했으니 거듭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거듭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십시오.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때부터 내 육의 속성이 대부분 소멸되어가며 

주님의 능력과 의지로 견인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여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성품이 내 안에 가득하니 

옛사람일 때 분노하고, 판단 정죄하고, 거짓말하고, 교만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던 그런 악한 구습들이 내게서 물러가기에 

거듭나기 전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보이던 

좁은 길이 좁게 보이지 않습니다. 

좁은 문이 좁게 보이지 않습니다.

내 십자가가 그렇게 무겁게 보였는데 거듭나면 당연히 내 것이기에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으로 참 자유함을 누리며 그 길을 갑니다. 

그 마음속에는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기대감과 기쁨이 가득하여 

이생에서의 어려움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굳이, 무리하게 비유하자면... 

내가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고자 한다면 

보통 스트레스받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힘든 줄 모르고 스트레스 안 받고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나기 전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던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기쁨의 것으로 변하여 즐겁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마음가짐의 차이입니다.

거듭나기 전 내 능력과 힘으로 한다고 여겨지니 힘든 것입니다. 

즉, 내 육의 속성의 기반삼아 하려니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성령께서 나를 통해 하시기에 

결코 힘든 법이 없습니다. 영으로 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귀한 영적 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28-30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거듭나면 성령님이신 주님이 나를 통해 대신 하시니

비록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기쁘고 내 영이 쉼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일 때 무겁게 느껴졌던 짐이 가벼워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여...

회개도, 자기 부인도, 거듭남도 없으면서 주님이 은혜로 다 알아서 하시니

육적으로 막 살아도 내 마음이 편하고 가볍다는 나태한 식으로 해석하여 

방종의 삶을 살아도 되는 허가증으로 해석했다가는 멸망만이 기다립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안 계시면 산을 옮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시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생깁니다. 

당연히 내 안의 성령님이 하시니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무엇인들 못 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에 대한 강력한 믿음입니다. 

순교현장에서도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 

나는 구원받는다는 확신의 믿음이 서는 것입니다.

왜 확신이 설까요...

구원받을만한 사람은... 구원받을만한 사람답게 내 안의 성령님께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시며 확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접붙임 당하기 전에는 모두 개살구요 개복숭아입니다.

이는 비하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지극히 현실임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은 영을 담은 그림자요 껍데기요 허상에 불과합니다. 

껍데기를 위해 투자하지 마십시오.

껍데기 안에 있는 영이 진짜 알맹이요 생명입니다. 

접붙임이 없으면 우리는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듯,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해야 합니다.

부디... 

나를 부인 회개하며 주님께 접붙임 당하길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것이 우리 영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보존되며 사는 길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