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자신의 배로 큰 강을 건너려고 시도합니다.

이 강은 늘 범람하며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강 건너 저쪽 동네가 살기 좋다고 해서

이사를 하는 중인데 그동안 모아둔 살림살이를 전부 싸서  

배에 실었습니다. 

  

배는 강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치며 배가 무거워서  

가라앉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 사람은 고민합니다. 

배를 가볍게 하여 짐을 다 던져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둘 것인가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만약 짐을 버리지 않으면 배가 가라앉아 자신도 죽을 것이고 

짐을 버리면 자신은 산다는 생각 속에 갈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방법은 딱 한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짐을 지키려고 하다가는

사람마저 물에 빠져 죽는 상황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아깝지만 단호하게 짐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강을 무사히 건넜기에 살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지고 온 짐이 아까워 그걸 지키려다가 

결국 배가 전복하여 자신과 짐이 물속에 다 수장되었습니다.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같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조치할 것입니까... 

물론 첫 사람처럼 살고 봐야 하기에 짐을 버린다고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실 이론적으론 당당하게 남일 보듯 그렇게 하겠다고 하겠지만, 

실제 나에게 그런 상황이 되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장 26-27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장 24-25절)

 

위 두 말씀은 표현만 달리한 똑같은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으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아주 곤혹스러워하며 싫어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부인합니다.

이 말씀은 윗글에 예를 들었듯

모든 짐을 배에서 버려야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경우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까지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실제 문자 그대로 사랑하는 자기 식구들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지 버릴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의는

사랑하는 식구와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할 정도의 단호한 각오를 해야

성령으로 거듭나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제자가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일상사는 그 어떤 것이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 보다, 그 위에 두지 말라 말씀입니다. 

 

위에서 배 타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예를 들었습니다.

저 무섭게 범람하는 강은 빠지면 바로 지옥입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버리지 아니하면 결코 배를 탈 수 없습니다. 

딱 사람만 타야 전복되지 않는 배입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내 자아, 자존심, 탐욕, 교만, 명예, 물질욕, 악한 육의 습성, 

자신의 생각조차...  

이런 것들은 다 버릴 단호한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참 쉽지만, 실제 하려면 그게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믿는다는 많은 분들이 좌절합니다.

결코, 세상에 속한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다가 구원받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또 실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원숭이를 사냥할 때

작은 항아리 속에 바나나를 넣고 줄에 매달아 놓습니다. 

원숭이는 항아리 속의 바나나를 쥐고 꺼내려고 하지만

쥔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쥔 상태에서는 손의 부피가 커졌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먹이를 쥔 손을 빼면 되는데 그걸 못 합니다.

결국, 원숭이는 사냥꾼에게 잡혀 죽게 됩니다. 

이 원숭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습니까... 

자아, 자존심, 탐욕, 고집, 교만, 명예, 물욕, 악한 육의 속성 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과연... 참된 믿음 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세상 것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 상태로 거듭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이런 것을 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입술만이 아닌, 영혼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싫어하는 것들을 포기할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육의 악한 속성은 성령의 열매와 전혀 반대되는 속성입니다.

사람의 영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 

 

어찌 빛과 어둠이 함께 하겠으며,

그리스도의 영과 베리알이 함께 하겠습니까... 

이 두 기질은 서로 물과 기름이라 절대 혼합되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밀어내지 아니하면 성령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즉, 주님은 그 상태의 우리를 이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것이 방해하여 절대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노라 하면서 세상의 흐름에 젖어 삽니다. 

교회에 가면 안 그런 척 하지만 술, 담배 하는 분들 많습니다. 

사업상 비즈니스를 위해 로비하느라 룸살롱 가서 

강한 분내 풍기는 종업원들 옆에 앉히고 서슴없이 행동합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되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분을 냅니다. 

누가 나를 욕하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든지 돌려줍니다.   

명예를 위해서 끊임없이 달음박질 합니다. 

육의 습성이 올라와 머릿속에서 악한 생각이 와글거립니다. 

돈, 명예, 권력이 점점 높아질수록 바벨탑과 같아서

결코 허물기 힘듭니다. 

이러니 예수님도 돈 명예 권력에 찌든 귀족들을 제자로 쓰지 않고, 

명예도 권력도 없어서 버릴 게 거의 없는 소외 하층민들을 

제자로 택했음을 봅니다.  

 

이런 육적인 것을 다 유지한 채 어찌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주여주여 하며 은혜만 앞세우면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다 저절로 무마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어떤 분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제가 권면을 한 적 있습니다.  

믿는 분이면 술 좀 자제하고 입이 거칠면 안 된다고 웃으며 권고했더니 

믿음이 중요하지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순종은 또 행위라며 부정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거듭났다고 자랑합니다.

믿으면 은혜로 구원받는데 뭔 이런 행위가 중요하냐면서  

믿음의 삶으로 자유하라고 오히려 저에게 충고합니다. 

과연 이게 믿음일까요? 

이게 진정한 영적 자유함입니까?

이런 방종의 삶을 살면서 그저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 속에 세상 것이 가득하니 삶으로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진짜 믿음으로 가득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는데 주님의 성전인 몸에

어찌 술 담배를 취하며, 세상 것에 눈이 돌아갈 것이며,  

어찌 룸살롱 가서 여인을 탐하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분이 자기 부인은 매우 어렵다며 자기 부인을 말하면 

매우 싫어하고, 힘들어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자기부인이 아니라 은혜로 다 된다고 해야 매우 기뻐합니다.

싫다고, 힘들다고,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들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그리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날벼락 같은 말씀입니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구원받는 조건에 있어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옵션 정도로 취급합니다.

 

아닙니다.

무조건 있어야 하는 필수조건입니다. 

자동차에 옵션이 없어도 잘 달리지만, 엔진이 빠지면

시동조차 걸 수 없습니다. 

그 엔진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엔진이 달리도록 하는 게 연료인데 그 연료가 바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려고 해도 은혜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려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분명하게 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부인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장 7절)

 

우리가 왜 믿음을 갖고 주님을 따르려고 합니까? 

구원받아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흐름대로 살면서 주여주여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마귀가 뿌려놓고 심어준 세상 속성들을 움켜쥐고서는  

그 누구도 천국을 취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 목숨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면 주님을 잃어버립니다.

수많은 믿는 사람들이

입술로만 주님을 찾으며 거듭나길 구합니다.

입술로만 주님을 찾으며 구원받길 원합니다.

주님 외의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믿음, 회개, 거듭남, 구원이 

훼방 받습니다. 

세상 것에 연연하면 절대 주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주님을 택할 것인가... 

세상을 택할 것인가... 

주님께서 미워하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버리십시오.

주님은 두 주인 섬기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부인한 귀한 영혼만이 천국을 볼 것입니다. 

한번 죽으면 그다음의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아 숨 쉴 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지옥에서 울부짖는 때늦은 후회는 이미 떠난 버스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아무 소용 없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장 6절) 

너희는(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장 4절)

 

단호히 세상을 부인하는 마음은 믿는 자에게 필수입니다.

자기 부인 없이는 회개도 거듭남도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를 미워하고 부인하면서 주님을 찾는 자를 기다리십니다. 

그런 귀한 간절한 영혼은 외면치 않고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즉, 자기 부인의 길은... 사람 스스로는 절대 할 수는 없는 영역이지만,

진심으로 자기를 부인하려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은혜로 도우시며 이끄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장 12-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