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2:21~32)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소통과 사귐이라는 정의를

아직까지는 가장 적절한 것으로 여긴다.

기도는 쌍방소통이다. 일방소통을 지양한다.

예를 들어,

내가 전지전능하시고 나의 인생을 궁극적으로

선량하게 이끌어 주실 뜻과 능력이 계신 하나님을 배제하고

귀를 막은 상태에서

지금, 여기에서 누리고 싶은

돈, 명예, 권력, 쾌락과 관계된 욕망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한다면

그것을 무조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의 응답인가?


반대로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다하더라도

무조건 하나님의 음성만 듣기 위해

내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인가?

부족하고, 한계가 극명하며

실존적 어려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내가

그 실제적 어려움을 하나님에게

아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막지 않으실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은 변치 않은데,

내 능력의 한계에 발버둥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긍휼함과 안타까움으로

얼마든지 귀 기울여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함께 눈물로 아파해 주시는 분이시다.


내 아픔을 호소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

내가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가장 선량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하나님이므로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뜻에 따르려는 것.

이 두 가지 쌍방소통, 긴밀한 사귐이 바로 기도이다.

내가 말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모두 존중 받는 기도.

단, 전제는 나의 하나님을 햔한 마음과

하나님의 나를 향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에 정신 팔려 하나님을 수단화 한다든지,

하나님 앞의 나를 무조건 누르는 것 모두 진정한 기도상태가 아니다.

오늘 야곱의 얍복강 기도는 참으로 특별하다.

그의 기도와 투쟁은

자신의 어려움과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강한 요구가 보여서

마치 자신의 욕구를 해소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뜬금없는 세상적 욕망을 추구하는

가장 곤란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과 더불어

실존적 고통과 절망이 뒤섞인 가장 현실적인 모습의 기도이다.

분명한 것은 야곱은 이제

자신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믿음의 소유자인 것이 분명하다.

자신에게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적 욕망이 별도로 있어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행동하는 모습이

오늘 말씀의 장면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그는 이제 분명히 하나님을 따르는 자의 반열에 오른 듯하다.

그래서 이름도 '이스라엘'이라 지칭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