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깨어 있음 에 대하여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혹은 경고로, 
또 후세에 성경을 읽을 우리들에게 호소의 말씀으로 
깨어 있으라 고 부탁하셨다. 
깨어 있으라 는 말씀은 성경 아주 여러 곳에 나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알지 못함이라 (막 13:35).


깨어 있다는 것
당신은 깨어 있는가? 
물론 우리는 매일 아침 깨어나 눈을 뜬다.  깨어 있다. 
그러나 그런 깨어남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음 의 의미는 다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다 는 의미를, 
단순히 말세의 징조들을 살펴보며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부탁 속에는 그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의미를 가만히 묵상해 보면, 
그 속에는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깨어 있다는 것은 본다 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안다 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그것은 매 순간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매 순간 깨어 있으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마음속에 성령의 안약 (계 3:18)이 눈에 발라져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명료하게 본다.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육신의 자아로부터 
올라오는 감정이나 생각에 휘둘리며 
무의식적으로 막 살아가듯이 살지 않는다.

깨어 있는 사람은, 매 순간 깨어서 자기 자신을 지켜 보고, 안다. 
얼마나 자주, 아니 얼마나 지속적으로 
육신의 자아가 살아나는지를... 
그 육신의 자아가 살아나 어떤 생각을 일으키고, 
어떤 변명을 하게 하고,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지, 
그 육신의 자아가 어떤 욕망을 일으키고, 
어떤 방어를 하게 하고, 어떤 것에 집착을 하게 하는지를... 
그리고 그 육신의 자아가 일으킨 생각과 감정이 생(生)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과 뒤얽힘들을 만들어내는지를... 
또 우리의 육신에 붙은 에고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 
때론 훌륭한 영적인 모습으로, 때론 야비한 세속적인 모습으로 - 
모양을 바꾸어 나타나 혼돈시키는지를 안다.


갈라진 두 마음
왜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다는 것을 그렇게 자주 잊어버릴까? 

왜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영적인 무의식의 잠에 빠져 
옛날에 육신의 자아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까? 

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자아는 죽고 
마음 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까?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지, 
왜 다시 육신의 마음으로 돌아가 갈라진 두 마음으로 살까? 
육신의 에고가 부추기는 대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우리들이 영적인 깨어남 을 잃어버리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까 봐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권면해 주었건만, 
우리는 곧잘 어리석은 사람이 되곤 한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는, 

그리고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 (롬 6:11)는 
바울의 간곡한 부탁을 잊어버린 채...

우리는 언제까지 갈라진 두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죽으셨듯이, 
우리도 단번에 죽을 수 없는 것일까? 
자신을 다 드려 죽고 나면 우리 존재 자체가 없어질까 봐, 
우리가 진짜로 다 죽어 없어져버릴까 봐, 
그래서 우리 자신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만 사시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우리는 자신을 끝까지, 죽기까지 복종하는 데까지 
내어줄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매일 죽노라
사도 바울은 말했다. 나는 매일 죽노라 고... 
예수님을 만나 온전히 거듭나는 경험을 한 훌륭한 사도 바울도 
육신의 에고가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서 이렇게 외친 것이다. 나는 매일 죽노라! 
사도 바울보다 너무 연약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매 순간 죽노라 고...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자아인 에고(ego)에게 노(No)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지 않은 모든 것에 노(No) 하는 것이다. 
매 순간, 인정받고 싶어서, 칭찬 받고 싶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주도하고 싶어서 
올라오는 에고에게 노(No) 라고 외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때로 모습을 바꾸어
자기 연민, 자기 동정, 쓸데없는 자책감, 
그리고 자기 비하의 감정의 얼굴로 
다가오는 에고에게 노(No) 하는 것이다.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반대되는 모든 감정 - 
미움, 오해, 교만, 질투, 모함, 비판, 판단 등등에 노(No)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생각에 노(No) 라고 말하는 것이다.


판단하는 것
당신은 거듭났는가? 당신의 자아는 죽었는가? 
그리고 마음 속에 예수님만이 사시는가? 
육신 자아가 아직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 있는 명백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다른 사람을, 
세상을, 모든 것을 판단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판단한다는 것은 아직 에고가 살아있다는 큰 증거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말라고, 
심판은 아버지께 맡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비판하고 판단한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아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자기가 표준의 잣대가 되고, 
그 잣대로 모든 것을 재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삶의 과정을 위하여 마련하신 고유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함부로 재는 것은 
하나님께 매우 불경한 일이 될 것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은, 
그래서 남을 늘 판단하는 사람은,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고 끊임없이 분석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런 사람들은 비판과 판단을 하는 것에 너무 바빠서, 
그리고 마음속으로 분석하는 일에 너무 바빠서, 
삶의 아름다운 관계들과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행복을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깨어나서
우리는 깨어나서 눈을 떠야 한다. 
육신의 에고의 눈은 감고 하나님의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육신의 에고의 귀는 막고 하나님의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한다. 
육신의 에고의 입은 틀어막고 하나님의 마음의 입을 가져야 한다. 
육신이 죽고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만 남은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마다 아름다움이요, 귀로 듣는 것마다 감미로움이요, 
입으로 나오는 것마다 감사이리라!



깨어나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깨어 있으라. 
깨어나서 매 순간 육신의 자아가, 죽었던 자아가 
어떻게 살아나려고 꿈틀거리는지를 지켜 보라. 
영적인 무의식의 잠에 취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자칫 육신의 자아의 생각이 휘두르는 대로 
딸려가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늪에 빠질까 조심하라.  

깨어나서 삶을 살아가라. 
그러면 육신의 자아가 살아나 소리칠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벌써 오래 전에 죽었다. 이제는 하나님만 내 안에 살아 계신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