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내게 해를 끼치면,

당한 만큼 이상의 복수를 다짐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홍콩 무협영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은원관계의 주제로 만들어지는데

주인공의 원수가 암투로 인해 부모를 해하고 유유히 사라집니다.

어리고 힘없는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음을 실감하고

복수를 굳게 다짐하며

무예가 뛰어난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무예 스승을 만난 주인공은 부모가 죽는 순간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복수를 다짐하고, 그 마음이 에너지가 되어 

약 10여년 동안 고된 수련을 견디며

드디어 의젓하고 잘생긴 20대 초반의 무술 고수가 되어 

원수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드디어 원수와 맞닥뜨린 주인공은 피의 복수를 합니다.

원수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후 부들거리며 쓰러집니다.

이 순간 영화를 보는 사람은

얼마나 강하고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지 

그 시원한 느낌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광경인데

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 아십니까?

내 잠재의식 속에 복수해주고 싶은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라마든, 영화든, 만화든 어떻게 복수해가는지

시원한 결말을 보기 위해 가상의 현실 속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는 끝까지...

내 원수에 대하여 복수하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이 어른이든, 같은 또래이든, 동내 형이든...

한 번이라도 날 힘들게 했다면 마음속으로 뭔 동작을 

상상하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억눌림을 참고 있다가 

그런 무협 영화를 통하여 시원하게 원수 갚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대리만족이지만 결국 용서 없이 복수를 한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에게 심한 말을 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당신도 내가 당한 것처럼 똑같은 기분을 느껴보게 하려고 

어떻게 복수할까... 머릿속에서 계산이 오갑니다.

이 순간 우리 몸에 좋지 않은 엄청난 호르몬이 분비되어

몸의 면역기능을 떨어뜨리는 좋지못한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복수의 칼을 갈게 하는 마음이 왜 드는지 아십니까?

마귀가 생각을 넣어서 복수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하나님을 닮은  

맑은 영이었기에 원수에게 복수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후 

마귀에게 내준 바 되어 죄가 들어왔기에 

복수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마귀가 서슴없이 

사람에게 넣어주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

복수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등

사악한 생각이 들어오면

믿는 분들은 마귀의 역사임을 바로 알아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은 이런 현상을 인간의 기본 형질로 알기에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자기 원대로 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이런 죄의 포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

 

믿노라 하면서도 이런 마귀의 궤휼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자신은 아직도 마귀에게 눌려서 휘둘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교회는 열심히 다니며 믿음 생활을 한다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기에 모양만 크리스천일 뿐 

속사람은 아직도 성령님을 모시지 않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정 거듭난 성도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감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그냥 쉽게 생기지는 않습니다.

믿는 자 안에서 늘 두 법이 반드시 싸우게 되어있습니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우리의 영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된다고 다짐하지만,

마귀에게 잡힌바 된 우리의 육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도록 유도되기에,

내 속에서 이렇게 두 법이 옥신각신 줄다리기를 합니다.

이 순간, 주님은 마귀로부터 온 복수의 마음을 누르고   

용서하게 하는 마음을 강하게 주셔서 내 의지는 용서하는 방향으로

급선회 하여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을 이기게 하십니다.

육적인 갈등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결국,

용서하는 방향으로 틀어버리게 하십니다.

진실로 믿는 자는 끝내, 이렇게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육을 입고 마귀가 권세 잡은 세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마귀의 철저한 방해를 받으므로 

모두 쉽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고,

좁은 길이고,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주님과 접붙임 당하지 않은 분들은

싸워주실 성령님이 없으니, 쉽게 마귀에게 패하여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하는 방향으로 틀어버리거나,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기에 그 마음이 누적되어 화병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할 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하지 못할 자를 용서하는 게 참된 용서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성령을 받고 거듭난 분들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았기에 성령님의 만지심으로

용서 못할 원수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용서를 넘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마저 들게 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성령 받은 자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능히 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 말씀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19장 26절)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들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용서하지 못할 원수에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정말 자신이 진실로 회개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진실로 회개하지 않았다면

주님께 용서받지도, 거듭나지도

성령도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실로 회개한 자에게만 값없이 주어지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회개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내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원수를 용서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게 됩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주님이 내 안에서 그리하도록 만드십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장 22절)

 

자식을 죽인 원수에 대하여 모두 용서하고 사랑하기까지 하셔서

거듭난 사람의 사랑과 용서가 어떤 것인지 표본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의 거룩한 용서와 사랑이 다시 한번 떠오릅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장 27-28절)

 

자신을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했으나

원수를 눈물로 용서하며 교도소까지 찾아가 기도해주신

귀한 어느 목사님의 말씀도 떠오릅니다.

용서하지 못할 자를 용서하라.

사랑하지 못할 자를 사랑하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4-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