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심었다고 해서 
금방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름의 폭염과 폭우 가을의 가뭄과 태풍 
겨울의 한파와 폭설을 견디고 지나야 
작은 씨앗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 
뿌리 깊은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분명, 생명임에 틀림없지만 
곧 바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병치레도 하고 사고도 당하고 
헤일 수 없는 성장통을 겪는다.

또한 사람들에게 거절 당하기도 하고 
상처도 받으며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인생은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믿음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고 성숙될 때 까지는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과 기근(飢饉)을 만나야 하고 
불에도 들어가야 하고 물 가운데로 지나가기도 해야 된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인도하신 약속의 땅으로 갔지만 
그 곳에서 그는 혹독한 기근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아무리 잘 믿어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믿음이 좋아도
기근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분명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순종하여 
그렇게 했던 것인데, 
현실은 엇박자가 나거나 
이전만도 못한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이와같은 일을 겪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상처를 받게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내가 약속을 잘못 받은 것인가?'
'내가 주의 음성을 잘못 들었나?'
'내가 잘못 살고 잘못 믿었나?'
이런 상황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럽고 혼란에 빠지는가?

'♬믿음으로 사는 자는 만사형통하고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는다~' 해서, 
그 믿음 하나 붙잡고 여기까지 왔는데, 
와 보니 약속과는 너무 다른 상황들이 
사방을 감싸고 있을 때 우리는 무너지게 된다.

'내가 그동안 믿고 붙잡았던 건 뭔가?'
'믿음의 끝이 이렇게 참담하단 말인가?'
이런 낙심속에 주저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쉽고 넓은 길을 찾게 된다.
이와같은 때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감각적 기분이나 수시로 변하는 상황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뿐이어야 한다.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보다 불신자가 더 잘되고 
어떻게 의인들은 고난이 많고 악인들은 형통하는가?
어떻게 믿음없이 사는 인생들은 탄탄대로 꽃길을 걷는데, 
기도하느라 기진하고 
주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나는 가시밭 길인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내가 잘못 믿은 건 아닌가?
그렇다고 큰 기적이나 큰 부자나 
큰 성공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렇게 곤고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게 된다.
심지어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봄이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한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면 
옥토를 만나도 부족한데, 
점점 더 척박한 사막을 만날 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심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음을 놓치면 안된다.

나는 살 소망이 없을 정도로 장기간 투병 생활을 해왔다.
마치 바울 사도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극한의 시간들을 보내며 사선을 넘나 들었었다.
한 번은 여러가지 기도제목과 무거운 짐을 가지고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신호등에 걸려 
정차중에 중앙선에 고양이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읖조렸다.
"야, 야옹아 너는 참 좋겠다.
이젠 아무런 고통도 염려도 눈물도 없겠구나ㅠㅠ"

지나 온 험로를 다 이야기 할 수 없지만
한 번은 차를 몰고 터널을 지나다 
내 의지로 차를 멈춘 적도 있었다.
이유는, 누군가 나의 차량을 추돌하여
생명수 흐르는 강가로 속히 올라 
주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모든 차량들이 내 차를 피해 갔고 
나는 마음을 추스려 가던 길을 
다시 주행한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찌 필설로 다 표현 하겠는가?
이런 동토와 같고 헤일 수 없는 굽이 도는 길을 돌아 
때로는 벼랑 끝에서, 때로는 낭떨어지의 끝자락에서 
머물다 오늘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아직도 난, 가야할 믿음의 여정이 멀고, 
단단하고 질긴 자아로 인하여 속상하지만 
아주 조금씩 주님을 더 알아가려 
애쓰는 공사(工事)중(ing)인 사람에 불과하다.
또한 이런 저런 험지를 지나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비바람에 흔들리고 
강풍에 무너지고 불같은 시험을 만나면 
지금도 두렵고 떨린다.
그러나 경이롭고 감사한 것은 그런 일을
마주할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시고 
뼈 아픈 기근을 우회하지 않고 
오직 은혜와 기도로 정면돌파하는 마음을 
한량없이 부어 주신다.

때로는 기도할수록 돛대가 부러지고
배가 흔들려 난파선이 될 때에도
믿음(약속+말씀) 하나, 붙잡고 견뎌낸다.
이따금씩 다 내려놓고 싶을 만큼 속의 근심 밖에 
걱정이 밀물처럼 몰려 오지만
그 기근을 통해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안아주심'을 뜨겁게 체험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나를 휘감아 구름 위를 걷게 한다.

아마도 나에게 기근이 없었다면 
   눈물이 메말랐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기근이 없었다면 
   기도를 멈추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기근이 없었다면 
   영적 외로움을 감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기근이 없었다면 
    24시간 주를 바라보는 일에 실패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기근이 없었다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기근이 없었다면 
    나는 누군가를 정죄하고 지적하는 '교만 덩어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기근이 없었다면 
    근사하게 포장된 종교인으로 여생을 마쳤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주안에서의 기근은 기적이 되며 
주안에서의 흉년은 결코 '힘들다' '나쁘다' 할 수 없다.
마침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 
그 어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심이 믿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기근을 풍년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모양의 기막힌 기근을 통해 
우리의 영혼의 근력과 속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떡하든지 기근을 회피하려 하고, 
기근이 (없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세상에 그 어떤 기근도 우연한 기근은 없고, 
기근없이 성장하는 믿음 또한 없다.
모래알만 한 기근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목적이 있으며 
그 계획과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기근을 피할 순 없다.
물론 기근이, 믿음의 여행에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믿음의 마침표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가나안(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전 것은 잊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쉬임없이 달음질할 뿐이다.
가나안은 거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행14:22).
기구하고 혹독한 기근과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지나서야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것도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쉬임없이 달음질할 뿐이다.

'험한 파도가 유능한 선장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있듯이 
버거운 기근을 지날수록 우리의 속사람은 강건하여 지고 
만만치 않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며 
예고없이 광풍이 불고 태풍이 휘몰아쳐도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한 영성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고 사는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우리의 아빠'시고 
그 분의 그늘에 거함이 최고의 안전지대이며, 
그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