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나 삶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꼭 다른 데서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하여, 원망증이 생기고, 이웃 형제간의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트러블이 형성되 정죄 판단이 난무합니다. 

이제 이들 사이에 서로 죄를 범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가장 원하는 무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자아가 죽은 사람이라면, 차후 더이상 트러블이 생기지 

않습니다. 

상대보다 나에게 원인과 문제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사람을 자극해 도발하더라도, 자아가 죽은 사람은 

마귀의 도발에 휘말리지 않기에, 죄의 근처로부터 떨어진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 양심을 만지셔서... 

나조차도 들보의 죄인임을 알게 하시는데 누가 누굴 정죄 판단할 

마음이 올라오겠습니까... 

그래서 서로간 이기적 다툼과 원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장 42절)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여건들이... 무조건.. 나의 기준대로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진짜 뜻과 방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나에 대한 주님의 계획적 방향은 생각지 않고 무조건 '나에게 이런 

기준이 있으니 이대로 이루어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내 임의로 선악의 기준을 확실히 정해놓고 기도로 밀어붙입니다. 

나의 악하고 어두운 자아를 죽여주셔서 내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뜻)대로 해달라는 기도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내 기준대로 외적인 모든 여건들만 바뀌길 

간절히 원하며 각자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하여...

자기 기준대로 기도 응답이 없으면, 내가 드린 기도 정성이 얼만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절망감에 빠져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 큰 환란이나 삶의 어려움이 닥치면... 

주님의 은혜로 그 환란을 이길 능력의 지혜를 구하는 게 아니라, 

그 환란은 내가 뭔가를 하는 데 방해가 되니 없애주길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무거움을 견딜 수 없으니 거두어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장 23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장 27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세상의 기준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일부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형편이 무조건 내 기준에 맞춰지길 원하며 

나에게 주님의 뜻을 맞춰달라는 것은 매우 큰 교만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을.. 내 맘대로 길들여보겠다는 악한 마음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제가, 그런 미련한 자였습니다. 

주님은 양과 염소를 가르고자, 마귀에게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하여...

이 땅의 공중 권세는 사탄 마귀가 굳건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의 끝날까지 마귀의 권세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마귀의 공중권세가 없다면 십자가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탄 마귀는, 그 권세로 끝도 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내 개인적 열망으로 마귀가 계획을 바꾸거나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해결 방안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중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중국이란 곳은 기독교 박해국으로 소문난 나라임을 알 것입니다. 

한번은 중국 가정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서방의 인권 국제모임에 

참석하여 중국 교회를 위해 기도요청을 호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전파 문제로 감옥에서 12년 옥살이한 분입니다. 

그가 과연 어떤 내용의 기도요청을 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중국 교회가 안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주변 

여건을 맞춰달라고 기도요청 하겠거니 수근거렸습니다. 

즉, 중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도록 요청하는 기도겠거니 했지만, 

그의 기도 제목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공산주의 붕괴도 아니고, 종교의 자유도 아니고, 박해로부터의 

자유로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요청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멈추길 위해 기도하지 말아 주십시오. 

교회 박해 가운데 그걸 이겨낼 능력을 달라는 은혜 요청의 기도를 

간절히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 역시, 공산주의조차 주님이 허락하셨음을 알기에 내 기준대로 

그걸 멸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안락하고 안전하며 편안한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거둬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질 능력을 달라는

기도 부탁이었습니다.

거기에 참석하여, 그의 이 기도 부탁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한순간 자신이 부끄러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합니다. 


박해가 극에 달했던 초대 교인들도 

이 박해로부터, 자유로이 평화롭게 신앙생활이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들도 역시.. 이 박해로부터 

더욱 믿음이 견고해지고, 핍박를 능히 이겨내는 

능력의 은혜를 달라고 너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도의 기독교인이었던 시성 타고르의 기도를 보십시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하지 마옵시고,

위험에 처해도 겁나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고통 속에 처해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조력자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인생과 싸워서 이기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내가 너무 기쁘고, 성공했을 때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 믿도록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 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배고플 때

하나님이 내 손목을 꽉 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한 이분들 역시... 

이미 주님으로부터 공중권세를 허가받은 사탄 마귀가 

기독교인들에게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핍박한다는 것을 알기에 

핍박을 이길만한 능력과 은혜를 먼저 구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내 육적 기준의 생각이 아닌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 주님의 보좌를 흔드는 능력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평화의 시기에는 오히려 부패하여 타락했지만, 박해의 시대에는 

그 박해의 바탕 위에 더 신앙심이 불타올라, 열방에 번져간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귀에게 공중권세를 허락한 주님의 큰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섭리를 너무나 잘 아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결국... 

육적 평안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영적 평안을 구한 것입니다.

먼저 내가 성령으로 변화되어 마귀의 지독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더욱 믿음 위에 서도록 절박하게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 문제든, 이웃 형제들과의 문제든, 삶의 문제든... 

이런저런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주변 여건이 아니라, 나 자신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변의 모든 여건은 내가 변화되면 필히 

저절로 변화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변화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달라 보입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육의 속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거듭나 영의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달라져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예전 같으면 어떤 상황에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힘들거나 

참을 수 없던 것들이 오히려 이제는... 사랑과 용서와 긍휼로 

바뀌어, 온화하게 감싸고 포용하려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으로 느낄 수 없는, 진정한 영적 평안입니다.


찬송가를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주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가리라... 


그렇습니다. 

내가 변화되면, 죄인도 내 원수도 모두 친구로 보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히 변화되었으므로 

원수지간을 끝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 나를 부인하지도 

변화되지 않으려고 하면서 세상 여건이 내 의지대로 

어떻게든 변화되길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교만입니다. 

세상의 여건은 내가 원하는 기준대로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먼저 변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먼저 

내가 나를 단호히 부인하고 회개하여 성령으로 거듭남을 받아야 

비로소 내 눈에 비취던 세상이 바뀌어 보이는 것입니다. 

영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된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거듭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3서 1장 2절)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다음의 기도를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마귀의 핍박을 사용한 주님의 계획)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장 42절)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 중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가르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너희 육신의 기준대로 구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주님의 뜻)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

(마태복음 31-33절) 


온전한 믿음이 되려면 나의 모든 기준과 뜻이 없어져야 합니다. 

내가 죽고, 나를 통해 오직 그분의 참된 뜻이 이뤄져야 합니다. 

내 중심적 기준대로 모든 상황이 바뀌길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극복하고 이겨낼 은혜를 구하는 것이 참으로 

올바른 기도입니다. 

내 생각과 의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이루어지길 원하지 말고 

부디... 주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마, 단 한 마리의 양도 잃지 않으려는 주님께서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과정은 광야 같아도 그 결과는 항상 좋게 하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2-4절)  


위에 올린 말씀을 간단히 정리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전혀 변한 것도 아니고 상황은 그대로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를 부인 회개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면, 내 옛사람으로 보던 

세상이 분명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것 가지고 힘들어했나 하며 웃음이 나올 것입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그분의 거룩한 눈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면... 

주님께서 나를,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은혜로 보호하므로 

마귀도 그 이후부터는 함부로 나를 쉽게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마치...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셨듯이... 


이 땅의 시간은 잠시 잠깐 거쳐 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짧은 나그네 길에 올인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푯대는 이 땅의 안락한 삶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 드리며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의 안식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