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예배는 
우리가 지금 드리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예식의 개념을 넘어 '삶과 관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한 것은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초대교회도 성찬과 애찬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슴을 
고린도전서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떡을 떼는 것 자체가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무질서해지고 
편당이 생기자 그들의 애찬도 깨어지고
밖에서서 들어오지 못한 채 
먹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유다서는 교회안에 있는 배도자를 향해 
'애찬의 암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무리를 향한 
분노를 담은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11장에서 
바울은 그들의 만찬예식이 거룩히 여겨지지 못한
사실보다 오히려 깨어진 공동체의 관계를 
책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초대교회는 
예배를 공동체의 연합과 달리 보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며 
예배자에게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고한 고백이 요구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향해서는 의의 확신이 생기고

사람을 향해서는 일체감과 서로를 향해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되고
공동체는 머리이신 주를 중심으로 한 
거룩한 연합의 근거를 갖게 됩니다.

이럴 때 세상을 향해서도 
주와 함께된 무리가 되어 죽으심을 분명하게
증거할 수 있는 영적인 근거와 담대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가 그저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자기의 거룩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무심히 반복할 수 있겠지만 
주께서 명령하신 예배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참된 연합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 근심을 끼칠 뿐입니다.
가정에서 드려지건 온 교회가 함께 드리건 
예배속에 이 거룩한 연합이 빠지면
즉시로 메마른 수식어만 가득한 
죽은 예배가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연합을 예배 때 확인해야만 풍성해지고
주님을 통해 
서로가 한 몸에 참예한 자라는 것을 예배 때 확인해야만
사람의 생각의 차이와 서로 다른 입장이 
주 안에서 조화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더 거룩하게 준비된 예배의 의식이 아니라 
주의 은혜앞에 더 정직해지고 죄로인해 깨어진 심정입니다.

그리고 서로을 향해 한 몸된 공동체의식과 
불쌍히 여기는 긍휼함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를 바라볼 때 
그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현저한 차이점이 될 것이며 
세상을 의로 정죄하고 심판할  기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