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오늘날 교회 안에서 대제사장의 직무가 무엇인지 또 무엇 때문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을 듣기 힘듭니다. 대개 나의 어려움이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대제사장이 사역하는 지성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소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이 간과하기에

거룩한 하늘 지성소에서 우릴 위한 주님의 대제사장 봉사와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 에 지성소에 들어가 영광의 광채로

임하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도말 하고 하늘 백성으로 인침 받게

해주시기를 위해 중보 기도합니다. 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제사장은 그들의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가랴 3장을 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1-3)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는 우리들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과 시련으로 계속 시달려 불타고 타서 불에 그슬린

볼품없고 흉측한 나뭇조각처럼 더러워진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것은 나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며 애통해하는 세리의 모습입니다. 그가 은혜의 보좌 앞에서

잠잠히 머리를 숙이고 있을 때 마귀가 그를 대적하며 참소합니다.

 

  “보세요 하나님! 이 사람이 지금 벌써 몇 번째 이 자리에 나옵니까?

얼굴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 저런 사람이 그리스도인 맞습니까?” 라며

참소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래 맞다! 불에 그슬린 나뭇조각과 같다.

그러나 그를 그슬린 것은 바로 너 아니냐? 그럼에도 저는 회개하기 위해

또다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온 것이다” 라며 마귀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

에게 이르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매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슥 3:4-5)

우리가 온전히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 굴복할 때에 그때 죄 사함을

주시고 아름다운 의의 겉옷을 입혀주십니다.(사 61:10) 그리고 정한 관을

씌워 하늘나라 백성으로 인쳐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한 것은 주님

뵈올 면목이 없지만 “감히”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돌이켜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감히 돌아가는 탕자의 모습 말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내 어디 가리까~” 눈물로 찬송하며

주님께로 나아가면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거듭남)

 

  지금의 많은 현대 교회는 “봐라! 여호수아나 탕자 같은 죄인들을

무조건 구원하지 않았느냐? 우리도 십자가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았고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합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은혜 받기 위해 때를 따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마귀의 함정 속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값싼 은혜, 쉬운 구원은 마귀의 미혹이요, 거짓말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중보 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 이기에 우리를 넉넉히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중보사역의 목적은, 우리를 마귀의 고소로부터 살려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갖춘 품성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함 등입니다.  

 

  우리 죄인이 예수님을 내 변호인으로 선정한 그것만으로 무죄가

되어 재판이 끝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변호사가 벌어준 은혜의 시간

동안에 돌이켜 회개하고, 하늘 성소에서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눅 13:8) 라며 우릴 위해 중보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운 성품으로 변화되어 마지막 날의 재판(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도는 마귀가 괴롭히고, 유혹하고, 넘어뜨리고, 함정에 빠뜨리는 온갖

시험과 시련 속에 불타고 타서 거슬린 볼품없는 나뭇조각일지라도 매일

매일 회개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품성을 보시고 의의 옷과 정한 관을 씌워주십니다.(거듭남)

 

  우리 모두 턱없이 부족하고 주님 뵈올 면목이 없을지라도 주님께 굴복

하며 회개하기 위해 매일 매일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감히 나아가 주님의

은혜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