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친구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 한번 나눌 친구가 없다면
교회 안에서 나의 마음을 열고 
이웃에게 다가가서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오랜 세월 기독교는 성도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네 것 내 것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서로 유무상통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전통이었다.

위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이웃에게는 사귐을 통하여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것이
교회의 참모습이요 성도의 아름다운 전통이였다.
장로는 장로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고 
목회자는 교회 안에 마음 나눌 친구를 두지 못해서 늘 외롭다.

목회자와 성도가 친밀한 것 같으면서도 
마음을 털어놓고 가까이하지 못한다면
성도의 교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성도의 교제를 매주 고백하면서도 
교회에 와서 단 한 사람과도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오늘날 성도의 교제가 예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그 뜨거웠던 사랑의 모습이 희미해져 가며
그나마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서 같이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던 풍토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과연 나는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
친구의 아픔을 보고 내가 달려가 위로해줄 친구는 얼마나 되는가?

말로만 하는 성도의 교제와 사랑은 
내가 외식 주의자라는 증거일 것이다.
서로 교제도 하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먹혀 들어갈 리가 없다.

친구를 위하여 마음을 열고 
물질을 열어 함께할 수 있어야 진정한 친구일 것이다.
주님은 황송하게도 우리를 친구라 칭해주셨고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 구원하시며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다.
목사님들은 왜 자신의 교회 안에 친구들이 없는 것일까?
사역을 위한 업무적인 교제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장로는 왜 장로끼리만 어울리려 하는가?

나는 너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은 아닐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라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 교회 안에 진정한 교제도 
친구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 마음 나눌 친구가 없다면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성도여 서로 사랑하며 교회 안에 많은 친구를 사귐이 
신앙생활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서로 사랑하며 함께하는 것이 교회요 성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