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음에 대하여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만있어도... 주님이 다 알아서 나를 긍휼히 여겨 내 손을 잡아주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모든 인류는 주님께 긍휼함을 받아 다 구원받아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받을 자가 아주 적다고 하십니다. 이는 상당히 모순된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이 틀린 것일까요? 아니면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틀린 것입니까? 원래 진리가 아니면 반드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 모순을 억지로 꿰맞추려고 하기에 성경을 변개하고 비틀어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아닌,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교리는 항상, 주님의 입장보다 사람의 육적 입장을 대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이 좁고 협착하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어도, 사람의 편의에 맞춰 어떻하게든 쉬은 길로 만들려 힘씁니다. 성경은 전혀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단 하나라도 더하거나 빼거나 변개시켜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자가 적다고 하셨으면 당연히 적은 겁니다. 자신을 돌이켜 회개와 거듭남의 정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으면 무조건 그런 겁니다. 인간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려고 구원의 문을 넓히길 힘쓰고 돌이킴도 회개도 거듭남도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당신들은 이미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며 은혜와 평안을 무한정 주입하며 희망을 심어줄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분명히 아닌 겁니다. 정말 구원받을만한 자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의 삶이 있고 반드시 열매가 있다고 하셨으면 당연히 그런 것입니다. 열매와 순종은,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별개라고 하며 부인한다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증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백 퍼센트 그대로 됩니다. 또한,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성령을 선물로 받으려면 나를 육으로부터 단호히 돌이켜 간절히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이것이 바로... 주님을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구하지 않는 자(자기 부인도 회개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줄 수 없다는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아무에게나 귀한 진주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모든 걸 단호히 다 팔아야(자기 부인) 가능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복음으로써 손을 내미셨습니다. 아주 간단한 원리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먼저 내민 손을 간절한 마음으로 잡으려고 한다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 그것입니다. 성경의 본질을 벗어난 믿음과 은혜와 구원 교리에 몰입되어 주님께서 내민 손을 잡지도 않았는데 (육을 돌이켜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여 거듭남도 없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님이 다 알아서 은혜로 구원시키리라는 것은 참람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마귀가 심어준 헛된 거짓 은혜주의 입니다. 교회만 다니며 성경을 좀 읽었다고 주님의 손을 잡은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까?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육의 달콤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구원받길 원하다 보니 내려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입술로 부르짖었으나, 정작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적 육의 미련이 많아 이를 고수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주님께서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 육적인 것이 자신을 가로막아 온전한 복음의 진리가 귀를 열고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마가복음 4장 19절) 주님은 간절히 육을 비우려는 자에게 성령으로 채워주시지 유지하려는 자에게는 절대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비우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마귀가 심어준 육의 죄... 즉, 악한 습성... 탐심, 기득권, 교만, 방종, 분냄, 정죄, 판단, 속살거림, 시샘, 자존심, 자만심... 이 모든 것이 죄를 유발하게 하는 마귀가 준 속성들입니다. 이런 악한 것으로부터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돌이킨 자의 마음 밭에 생명의 말씀이 심어져 쑥쑥 커갑니다. 물론, 내 의지와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는 척은 해도 근본적으로는 결코,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내려놓으려는 굳은 마음을 주님께 드리며 간절히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내민 손을 잡는 과정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악한 죄의 속성을 비우려고 간절히 매달려야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세상 것들을 비워주시며 은혜로 나를 채우십니다.
지금은 회개할 만한 때이고, 구원받을만한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주님을 만나기에 가장 빠른 시간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숨이 멈추면, 그때 가서... 아무리 후회하며 간절히 매달린들 이미 문 닫힌 방주입니다. 그날이 되어 문 닫힌 방주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우를 범하지 않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의 동선이 뚜렷하게 그려집니다. 먼저 복음이 필요하기에 이스라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빕니다. 그리고 반드시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을 봅니다. 얼핏 보면 공생애 동안 우연히 만난 것으로 보이나, 주님의 역사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이유가 있기에 어떤 사람을 찾아가게 됩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그리했고, 귀신 들린 딸아이를 고쳐달라고 울부짖는 여인에게 그리했고, 소경된 바디메오에게 그리했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보려던 삭개오에게 그러했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시간을 조금 늦춰서 회당장의 딸을 찾아갈 정도였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찾아가는 과정에서 간절한 회복을 원하는 혈우병 걸린 여인을 만나 회복시키기 위함이었고, 또한,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나 마치 죽었던 나사로처럼 잠자는 영혼도 간절히 찾기만 하면 깨워주셔서 생명으로 회복시킨다는 권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은 물론, 구주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녀가 죽었다 하지 않고 잠잔다 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듯 주님 시간표의 계획대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의 종이 다 죽게 되었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종을 고쳐달라고 백부장이 오리라는 것을 아셨기에 그가 찾아오는 방향과 시간과 장소에서의 만남을 봅니다. 왜 이들을 만나주셨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회복시켜주십니다. 예수님은 특히나 귀신들린 딸아이 어미의 중심을 시험하기 위해 개에 비유하면서까지 면박을 줬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 면박조차 옳다고 겸손하게 받아드리며 예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주님을 구하는 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아셨기에 크게 기뻐하며 그녀의 원대로 귀신들린 딸을 회복시키십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몇 번 소리 질러 예수님을 구했으나 예수님은 그의 중심을 시험하기 위해 모른 척 그냥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럴 때, 바디메오는 더더욱 소리높여 간절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그를 외면하지 않고 회복시킴을 봅니다. 주님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바디메오처럼 한 두 번 구하다가 실망하여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더더욱 부르짖어 구하길 원하십니다. 이들이 그냥 입술로 '믿습니다' 해서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뜨거운 심장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과정이 있었기에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이들을 만나주시고 회복시킨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주님을 애타게 구하고 찾는 과정이 없었다면 그 믿음은 자신의 관념과 교리에 의해 만들어진 짝퉁 믿음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내민 손을 잡기 위해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님은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란 말씀을 괜히 하신 게 아닙니다. 내가 내민 손을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향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쓸데없이 자기가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 폄훼합니다. 너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저 입만 벌린다고 생명수를 먹여주지 않습니다. 갈증으로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자가 주님을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구하지 않고 얻을 수 없으며, 찾지 않고 찾을 수 없으며, 두드리지 않고는 열리지 않습니다. 이는 글을 쓰는 제가 아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교리만 앞세워 주님의 말씀을 뒤집으려 하지 마십시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1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9-13절) 주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쓸데없는 게 아닙니다. 물론, 육의 소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옥이 두려워 형식적으로 구하는 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함이 정말 간절하다면... 형식이 아닌, 뜨거운 심장으로 주님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든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 영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금식기도를 하며 매달리겠습니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주님께서 간절히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날 것이라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나무에 간절히 오르려고 하는 자를 올려주시고, 간절히 거듭남의 문을 통과하려는 자를 통과시키십니다. 목말라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물을 주십니다. 애초에 구하려는 간절함도 없이 자신은 이미 구원이 예정되었다고 스스로 확신하여 입술로만 '주여주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며 영적으로 나태한 자는 호흡이 멈추는 그 날까지 흰옷은 입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검은 옷만 입고 있다가 그에 합당한 곳으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내가 구원이 예정되었다고 확신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확신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개인적 확신이 아닌, 주님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아 성령의 인침을 맞아야 온전한 믿음이고 구원됩니다. 자신의 구원이 예정되었다고, 확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실상으로 거듭난 믿음의 성도가 최후의 그 날에 택함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내 지금의 삶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열매가 없다면, 나는 절대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구원받을만한 성도는... 반드시, 구원받을만한 거룩한 삶(열매)이 있습니다. 그 거룩한 삶(성령의 열매)은... 내 안에 계신 주님(성령)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님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괜히 그날에 이르러 열매를 찾겠다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열매가 없으면 어두운 곳(지옥)으로 던지겠다는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합니다. 결코,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육으로 호흡할 때가 일생일대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호흡할 때까지만 손을 내미십니다. 호흡이 멈추면 모든 것이 종료됩니다. 어서 육의 속성으로부터 나를 부인하고 돌이켜 회개의 자리로 나가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내민 손을 꽉 잡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의 애타는 바램대로... 간절히 매달리는 분들이 되시길 권면 드립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