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말을 

가만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너희 속에 예수가 없다”는 것이다.

거룩한 교회와 거룩한 예수를 선전하지만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것이다. 

이런 비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인도의 독립투쟁을 선도했던 간디도 서구 기독교를 경험하고는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그의 자서전에 남겼다.

 

그뿐 아니다. 

구소련에서 공산당 혁명이 일어날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면 

오늘의 교회에 전하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선 전제정치의 폭압과 정치 혼란 속에 

국민은 굶어 죽어가는데 

러시아 교회는 자기들만의 리그를 즐기고 있었다. 

교회 밖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국민에게 눈 한번 돌리지 않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우습게도 하나의 신학 논쟁엔 온 힘을 다해 집중하게 된다.


당시 교회가 양분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논쟁하던 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직자는 어떤 색깔 옷을 입는 게 맞는가,

영대(스톨)는 무슨 색으로 하는 게 맞는 것이냐 

같은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소모적 논쟁이었다.

사람 사는 세계 현실에는 눈을 감고 

오직 교회당 밀실 탁상공론에만 목청을 높이던 종교는 

결국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해 “종교는 아편”이라는 

호된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정의가 외면당하는 현실에 눈감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된다. 

교회가 교회 노릇을 못했던 러시아는 

결국 사회주의 공산국가로 넘어갔다.


어떤 학자는 마르크스를 보고 무작정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의 노릇을 하지 못할 때 

채찍을 들고 나타난 ‘이방의 예언자’라고까지 평가한다. 

심한 말이고 신성 모독적인 말일까.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이런 예가 발견된다.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들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이스라엘을 견책한 뼈아픈 역사가 그것이다. 

바벨론은 분명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불신의 땅이고 

우상의 나라였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방 나라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심판했다고 선언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는 교회 비판의 소리는 

일종의 “익명의 예언자” 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말대로 “하나님의 가면”은 아닐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 


거룩한 교회가 짠맛을 잃어버렸는데 어디 가서 항변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소리치는 자들에게 대항할 것이 아니라 

돌아와 말씀의 거울 앞에 겸허히 선 다음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돌아봐야 한다.


세상은 원래 더러운 곳이라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는 

그런 곳에 눈도 돌리지 말고 가까이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자. 

유대인은 ‘거룩’을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며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이라 가르쳤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거룩’은 유대인들이 피하고 구별하라는 

그 ‘더러움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 곳에 들어가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거룩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사건도 그렇고, 

가난하고 힘없는 갈릴리 사람 속으로 들어간 것도 그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도 그렇고 

십자가를 지신 것도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본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거룩이다.


교회를 일컬어 ‘거룩한 성도의 교제’라고 부른다. 

이것은 신자가 세상을 떠나 멀리 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 속에 들어가 관계하고 소통하며 거룩을 이루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개독교가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기독교의 맛을 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