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예배가 거절된 이유

 

   아주 먼 옛날, 소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보다도 더 오래인 인류의

시작 때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 가인

농사를 짓는 농부이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창 4:3-5),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느 날 부모님에게서 배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두 형제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는 

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형제간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형이 동생을 돌로 쳐 죽인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경을 펴서 한 두 장을 넘기면 바로 위의 충격적인 형제간의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성스러운 책에 그런 불미스러운 내용이

초반부터 나오는지 의아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되게 이 땅에 마귀의 후손과 그리스도의 후손인 두 부류가 서로

대적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창 3:15)

 

  하나님께서는 죽어 마땅한 가인을 즉시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마귀의

종이 된 그의 후손들이 만드는 세상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는

지를 온 천하가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시간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는

반역한 마귀를 그 즉시 멸하지 않은 이유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히 11:4) 가인은, 혼인예식에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어떤 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은 채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않으신지라“ (창 4:4-5) 하나님께서는 제물보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굴복한 당사자인 ‘내가’ 드려지는 제사를 원하십니다.

 

  가인은 부모님에게서, 에덴으로의 복귀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인

마귀의 사상을 따르며 선을 행치 아니하는 악한 자였습니다.

저는 악한 자에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느니라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12)

오늘날 의로운 행위를 폄하하는 이론들은 악한 자에게 속한 것입니다.

 

 “네가(가인)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가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려는 심령이 없었습니다.

대개 분노를 잘 내는 사람은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자만적인 자로서

자신의 본성이 발각되면 안색이 변하며 반항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 인간은 마귀의 사상에 세뇌되었기에 늘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의 소원을 버리고 죄를 짓지 않도록 다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즉 의롭게 살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 문에 죄가 마치 먹을

것을 노리는 사자처럼 엎드려 웅크린 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마음 문만 열면 당장 달려들어 우리를 삼키려 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구원을 맹신하며 죄를 버리는 회개가 없이

우상을 섬기듯 공허한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가인은 습관적인 죄를

방치하므로 마귀가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을 만든 자로서 그 상태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성경의 첫 부분에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열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기로 결단하지 않으면 그 죄가 형제를

죽이게 하고 가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안면 몰수하는 자로 만듭니다.(창 4:9)

 

  그러면 어떻게 죄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마귀를 비롯해 누구도 나를 강제로

죄를 짓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나의 선택이며 어쩌면 그

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혐오스런 음식은 먹기 싫듯이 죄가

혐오스럽다면 아무리 죄를 지으라 강요해도 크게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버리고 다스리는 방안도 마련해주셨습니다.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우리가 성령을 통해 부드러운 마음을 받고(겔 36:26)

우리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법과 일치하게 된다면(거듭남) 죄가 진정

싫어지고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소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두 부류가 있음을 암시해

주며, 나도 언제든지 가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죄를 다스리지 않은 채

자기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려 악을 이기는 방법은 거듭나 의로운 삶을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 충만함을 입어 죄를 버림으로

승리하는 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