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처마 밑에 거미가 사냥을 하기 위해서 거미줄을 노련하게 설치하고 있다. 

거미 똥구멍에서 끊임없이 빠져나오는 거미줄을 보면 재미가 있다. 

내 주변에서 함께 구경하던 똥파리가 겁도 없이 거미줄 근처를 어슬렁댄다. 

거미는 똥파리를 봤는지 정 중앙에 몸을 움츠리고 숨죽여 있는 모습이 나를 긴장시킨다. 


똥파리와 거미의 생존 게임을 보면서 내 삶을 들여다본다. 

똥파리와 거미는 원초적으로 경쟁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사회라는 거미줄 안에 옴짝달싹 못하고 걸려서 살고 있는 신세가 ‘나’일 것이 분명하다. 

똥파리는 그래도 거미줄 근처에서 자유롭게 날고 있는데, 

왜, 나는 그 거미줄 같은 사회에서 못 벗어나는 것일까? 

이른 아침 처마 밑에 있는 거미줄에 가보면 깨끗한 이슬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아침 햇살이 비쳐오면 보석 알처럼 빛을 발광한다. 

거미도 그 빛을 감상하는지 이슬을 털어내지 않는다. 

이슬이 말라버린 거미줄에는 또다시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긴장된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이는 생존을 위해서, 또 어떤 이는 사명을 위해 말이다. 

그리스도인들도 거미줄에 걸려 있는 이슬이다.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다. 흔적도 없이.... 

그리고 이튿날 다른 이슬이 매달려 자신을 발광하지만, 그 역시 사라질 숙명이다. 

거미줄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래도 역시 존재할 것이다. 

좀 더 좋은 자리에 매달려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애처로워 보인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 뭘 이야기하자는 것이냐면, 

우리는 사라진다는 것과 사라진 후 ‘나’ 영혼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베틀에서 실로 옷감을 짜는 것을 처음 봤다. 

날줄을 수백 개 연결하여 북이라는 씨줄이 한 번 지나가면 

바디집이라는 것으로 ‘탁’치면 씨줄이 날줄에 견고히 자리를 잡는다. 

씨줄이 날줄에 잘 먹지 않을 때 “씨도 잘 안 먹네.” 한다. 

우리가 대화중에 “씨도 안 먹네.” 할 때 그 말의 유래가 여기서 나왔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서 베틀 짜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날줄은 믿음과 비교된다. 

씨줄은 신앙과 비교되는 것 같다. 

날줄이 긴장되고 팽팽할 때 바디집이 매끄럽게 움직여 씨줄을 날줄에 먹일 수 있다. 

하지만, 날줄이 느슨하거나 균형이 안 맞으면 바디집에 의해서 줄이 끊어질 수 있다. 


성도의 믿음이 견고히 서 있을 때에 세상의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로서 모범되게 설 수 있지만, 

느슨해지거나 균형감각을 잃고 타협하면 원수의 유혹에 실족 할 수 있다. 

그리고 씨줄은 신앙이라고 본다면 신앙은 믿음을 견고하게 돕는 자이다. 

씨줄이 잘 먹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날줄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으면 씨줄은 척척 먹어 들어간다. 


믿음이 제대로 서 있는지 아니면, 

외식하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척도는 눈에 보이는 신앙이다. 

신앙을 분별하는 방법은 말과 행동이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지, 행동이 겸손하고 낮은 곳에 들어가 

그 일을 묵묵히 행하는지를 보면 그의 믿음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날줄과 씨줄에 의해서 좋은 원단이 짜지는 것처럼 

믿음과 신앙이 잘 조화를 이루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행함에 초점을 두고 기록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이 서 있으면 행함으로 증명된다. 라고 기록한 것이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수행 아니면, 고행일 뿐이지만, 

믿음이 있는 상태에서의 행함은 의로운 것이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하였다. 

여기서 이 구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것은 날줄과 씨줄이다. 

이 땅에서 믿음과 행함이라는 두 개의 발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 것 같다. 


세상은 이슬이다. 

나 또한 이슬이다. 

이렇게 이슬과 같은 존재에게 허락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믿음과 행함이다. 

이 두 가지를 짧은 인생이지만, 

자신의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살아간다면 이는 가장 지혜로운 자이며, 

축복 받은 자일 것이다. 

사라져 없어질 것을 추구하는 자는 세인이요, 

영원히 실존하는 것을 추구하는 자는 성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이슬인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인가? 

베틀에서 옷감을 짜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작품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도록 

믿음의 행진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