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두려움 또는 공포라는 감정은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개 생존과 안전에 대한 불안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것으로는 신체 또는 생명의 위험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는 두려움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위험한 일을 생각하거나

상상할 때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장래에 대한 불안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더 깊고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각 개인의 궁극적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다.

우리 인간은 사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잊어버리거나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냥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렇다고 물론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보통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미신과 사이비 종교가 파고들게 된다.

이단들은 인간의 근본적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무지한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들을 온갖 종교적인 위협을 가해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며

때로는 금품과 재산을 갈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통 교회에도 두려움에 대한 미신적 요소가 들어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들은 무슨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불안에 떤다.

심지어 길 가다가 넘어져도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며,

하늘에 검은 구름만 몰려와도 두려워 떤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대개 미신적인 것이다.

물론 어떤 특별한 죄 때문에 징계를 받는 경우도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죄책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무슨 일이 잘 안될 때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딤후 1:7).

 

그 외에도 교회 안에 들어온 미신적 두려움은 많이 있다.

헌금할 때에 감사함과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드리는 것들은 미신적 두려움의 예들이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종은 두려움으로 주인을 섬긴다.

왜냐하면 섬기지 아니하면 무서운 벌을 받게 되고

생명의 위협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은 싫든 좋든 억지로 주인을 섬길 수밖에 없다.

이런 섬김에는 존경과 감사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두려움과 공포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섬김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지으신

천지의 주재이시기 때문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행 17:24-25).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셨으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롬 8:32).

그래서 전에 원수 되었던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다.

 

이 사랑을 깨달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가 받은 영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인도하는 영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영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다.

종은 두려움에서 섬기고 마지못해 순종하며 율법적으로 행하지만,

자녀는 신뢰함으로 섬기고 기쁨으로 순종하며 감사함으로 행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금 어떤 신분에 있는가를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지금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마지못해 굴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대할 때마다 늘 당신의 잘못을 캐묻고 따지고

벌주는 분으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을 덮어 주시고 용납해 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로 대하고 있는가?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당신은 아직도 율법적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에 불과하다.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다 용납하시고

자녀로 받아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이지만,

결코 저주와 영벌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할 때 징계는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영원한 저주를 받거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이다.

징계를 받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징계 받는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히 12:6-8).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아니 저 세상과 장래의 어떠한 것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롬 8:38-39).

이러한 사랑의 확신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에

사단의 정죄와 미신적 두려움은 물러가고 참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요일 4:18).

 

그러나 주 안에서 참된 두려움이 있다.

이것은 보통 “경외”(敬畏)라고 불리는 두려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안에서 나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함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며,

존경함에서 나오는 조심스러움이다.

이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스승 앞에 나아갈 때에

왠지 온 몸이 떨리고 두려워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몹시도 조심스러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온 천지를 다스리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한시라도 그분을 경홀히 여길 수 없고

그분 앞에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빌 2:12).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크고 엄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하며 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죄악을 행하기에 용감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주의 율례를 따라 자기의 행실을 삼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엄위하신 하나님은 곧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늘 조심스럽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늘 나를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좋은 분이시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도 비록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변치 않고 날 사랑하시며 보살펴 주시는 좋은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순간이라도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할 때 늘 좋으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한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부끄러움이 많지만,

그리스도의 정결한 옷으로 나의 허물과 죄를 다 덮어 주셨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히 4:16).

그리할 때 높은 보좌에 앉으신 엄위하신 하나님이

나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아버지로 다가 오셔서 위로하신다.

우리에게 이런 아버지가 계시다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가?

이런 좋으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계시니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무서워하겠는가?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좋으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두웠던 이 세상은

환하게 빛나며 무거웠던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을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걸어간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