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행7:35) 

지금의 대한민국의 문제는 
법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더 나아 가서 남을 죽이는데 별별 법을 다 사용하고 
자기편이면 눈을 감아버리는 무법자들이 되고 마는 법통들이 
국민들의 마음에 울화를 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단도 들여다보면 바깥의 정치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밖으로는 법이요 하고 안으로는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빌붙고 맙니다. 
아주 더럽고 치사한 모습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같은 동족이 애굽의 사람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그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나서 그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행7:24) 
정의심과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는데 화해를 위해 개입했다가 
누가 너를 우리 위에 관리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 
애굽 사람 죽이듯 나도 죽일래 하는 거부를 당합니다 (행7:27-28) 

그 길로 애굽 사람을 죽인 범죄가 들통이 날까 두려워 
미디안으로 피신 하여 거기에서 40년 연단의 시기를 갖습니다. 
그걸 두고 모세에게 미디안 신학교라는 말을 합니다. 
모세가 스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행7:25) 할 때는 
N0 하시던 하나님께서 40년 후에는 불러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애굽 으로 파송합니다. 

그 정점에 불붙는 떨기나무의 광경이 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긴 했는 데 타지 않는 것이 바로 현재의 모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나 실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철저히 피동이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관리와 재판장이었던 모세가 관리로서 
지도자는 그대로이나 속량하는 자로 바뀌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는 인도자가 됩니다. 

또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중보와 대변자가 됩니다. 
바울도 스데반을 죽 일 때는 법대로의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속량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하고(롬9:3) 
나서는 속량의 사도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빌립보교회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을 짜서 기름으로 뿌릴지라도 기뻐하겠다(빌2:17)까지 말합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속량의 정신에 의해 
전해진 복음이 전 세계를 구원하고 있습니다. 
죽이던 재판장이 속량하는 자가 되어 살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