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미디안 광야학교 40년,
그리움과 외로움에 아침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창문도 기약도 없었던 노아의 방주생활,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했을까?
큰 물고기 뱃속에 3일간 있었던 요나,
얼마나 답답하고 냄새났을까?
아브라함의 노년생활,
얼마나 아들에 대한 사무침에 조급하고 힘들었을까?
엘리야의 그릿시내 생활,
물 없는 광야에서 얼마나 목말랐을까?
요셉의 억울함과 기다림으로 어우러진 13년,
얼마나 눈물이 주야로 음식 되었을까?
욥의 혹독한 고난의 시간들
얼마나 뼈아픈 하루가 천년과 같았을까?
그들에 비하면 지금 나의 아픔은
태평양 바다에 물 한 컵도 안되면서 왜 이리 호들갑 떠는 것일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실망치 말자.
내 뜻은 안 이루어졌으나 그분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지금은 나쁜 일이라도 나중에 좋은 일 된다면
그게 요셉의 감옥이 아닌가?
지금은 아파도 나중에 건강주신다면,
그것이 욥의 갑절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나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해도 주님과 함께라면
그것이 정금 같은 축복 아닌가?
길어봐야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 만년 살듯이
살아온 나의 우행(愚行)이 한없이 수치스럽기만 하다.
밥한 공기면 족할 것을
쌀 한 가마 욕심내며 살아온 세월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해 아래 모든 것이 손에 움켜쥔 모래처럼
술술 다 빠져나가는 것을 왜 그리도 더디 알았을까?
목숨 걸고 성공해 보겠다던 다짐도
주님 막으시면 부질없는 다짐되고,
전심 다해 건강 지킨다 해도 주님이 건강축복 열지 않으시면
병든 몸으로 주저앉게 되고,
내 인생 포기하며 자녀 뒷바라지에 헌신해 봐도
주님이 자녀들의 길 닫으시면 파수군의 허사 되고,
콩나물 값 아껴 쌓아 놓고 알뜰하게 살아봐도
주님이 흩으시면 결국 남의 돈 되고,
죽기까지 주님 따르리라 결정해도,
우리 주님 멀어지면 갈릴리 바다 어부 되고,
아무리 강함 자랑해도
주님이 모른척하시면 강함만큼 약함 되고,
온갖 재주와 능력으로 나의 인생 설계해도,
주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무너지는 성과 같고,
세상 물을 다 마셔도 말씀 모르는 인생은
수가성 여인의 갈증을 벗어날 길이 없다.
지금 이 아픈 환경은
나를 더 성숙케하기 위한 시간이며,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훈련의 기간이며
내 안에 있는 불량 부속을 갈아 끼우는
A/S시간 일거라 믿어야 한다.
더 멀리 더 높이 뛰기 위해 충전 중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궁핍하여 다행이며,
주님 안에서 번민하게 된 것도 다행이며
주님 안에서 외롭기에 행복하고
주님과 함께 새벽을 열 수 있으니 더 없는 기쁨이 아닐까?
아직도 내 속에 처리되지 않은 교만과,
뱃속에든 정욕, 입술에 묻어있는 독설과 비방하는 말들,
혈관에 흐르는 욕심, 오장육부에 박힌 고집,
세포 속에 숨겨진 회한과 원망,
관절 속에 꿈틀대는 거짓과 위선,
피부 밑에 감추어진 외식과 자랑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아픔은 너무 경(輕)한 것이라고 생각 되어 진다.
주안에서는 쓸데없는 시간이 없다.
모든 일이 쓸데 많은 시간이다.
실패의 시간도, 시행착오의 시간도,
병상의 시간도, 외면의 시간도, 광야의 시간도,
심지어는 다윗이 쫓겨 도망 다니던 시간도,
바울의 아라비아 광야의 시간도, 베드로의 배신의 시간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도, 탕자의 집나간 시간도,
요셉이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낭비 같은 시간들도
그분의 손길 안에서는 재창조와 새 역사의 시간일 것이다.
주여!
고달픈 인생과 고통스런 현실로 아파하고 있는 동안,
주님은 나의 영혼을 치료하시며,
주님의 은혜로 나 영혼의 기쁨이 회복되게 하시며,
지금은 잠깐 멈춰서 있지만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남은 평생 바빠지게 하소서.
하찮은 고통으로 내가 아파함으로
남은 여생 남의 고통 잊지 말게 하시며,
잠깐의 어려움으로 힘들어 할 때마다
주님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
주여! 나는 오늘도 내 구주 예수님만 더욱 사랑합니다.
우리모두 ! 성령의사람이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