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을 얘기하면 성전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성전을 지은 것이 솔로몬 혼자의 공로는 아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이룬 평화를 바탕으로 성전을 건축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의 다윗은 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싸움을 싸웠고, 

태평성대를 누린 솔로몬은 태평한 기간을 이용해서 성전을 지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전쟁 중에는 전쟁 중인대로, 

태평한 기간에는 태평한 기간대로 감당할 일이 있는 법이다. 

대표적인 여름 꽃인 수국은 토양에 따라 다른 색의 꽃을 피운다. 
산성 토양에서는 푸른색 꽃을 피우고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붉은색 꽃을 피운다. 
작년에는 붉은 꽃을 피운 수국이 다음해에 푸른 꽃을 피울 수 있다. 
토양 성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간혹 하나의 수국에 서로 다른 색상의 꽃이 피기도 한다. 
뿌리 부분의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국은 토양을 탓하는 법이 없다. 
어떤 토양에서든지 꽃을 피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환경을 이유로 신앙에 게으른 것은 한낱 핑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신자답게 살아가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전만 지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곳에 거룩한 나라가 건설되어 있었다. 
무조건 성전만 지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에 성전을 지어야 한다. 
신앙 행위 이전에 신자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한테 어떤 신앙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신앙심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어야 한다.

솔로몬 성전은 길이가 60규빗, 너비가 20규빗, 높이가 30규빗이었다. 
대략 27.36m×9.12m×13.68m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지었던 성막은 길이가 30규빗, 너비가 10규빗, 

높이가 10규빗이었으니 그때보다 열두 배가 더 커진 셈이다. 
그런 성전을 짓는데 7년이 걸렸다.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세상을 지으신 분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있었던 것처럼 

“성전이 있으라” 하시면 성전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당시 동원된 사람들의 수고가 누적될수록,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전이 점점 모습을 갖춰가다가 

7년이라는 기간의 수고를 통해서 완성되게 하셨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 믿은 기간이 경과할수록, 신앙을 위한 열심이 누적될수록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참된 성전인 우리가 점차 완성되어 간다. 
나이를 먹는 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지만 나잇값을 못하는 것은 자기 책임이라고 한다. 
예수를 믿은 기간이 경과한 만큼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분명히 그 사람 책임이다.

새로 개척한 어떤 교회가 있다. 
꾸준히 성장해서 장로 두 분을 세웠다. 
임직식에서 순서를 맡은 목사가 기도를 한다. 
“… 두 분 장로님을 붙들어 주시사 그 옛날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 이 교회를 넉넉히 떠받칠 수 있게 하옵시고…” 

성경에 어느 정도 들은 풍월이 있는 사람이라면 

솔로몬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그 기둥이 성전을 떠받친 것은 아니다. 
야긴과 보아스는 높이가 각각 18규빗이었고, 꼭대기에 5규빗의 머리가 있었다. 
반면 솔로몬 성전의 높이는 30규빗이었다. 
천장까지 닿지도 않는 기둥이 무슨 수로 건물을 떠받친다는 말인가? 
야긴과 보아스는 일종의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라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이다. 
야긴이 세운 것도 아니고 보아스한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야긴과 보아스는 그것을 선포하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착각을 한다. 
야긴과 보아스가 갖고 있는 메시지에는 주목하지 않고 

야긴과 보아스에 시선을 빼앗긴다.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혹시 우리가 야긴이나 보아스라면 주어진 메시지를 제대로 선포해야 한다. 
능력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일을 이루시는 분도 언제나 하나님이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는 한 가지 맹점도 있다. 
성전의 모형은 모세가 광야에 세웠던 성막이다. 
이동식 성막에서 고정식 성전이 되었다. 
얼핏 생각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 같기도 하지만 외형만 그렇다. 

이동식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는 성막이 항상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어디에 가든지 성막도 같이 움직였다. 
그런데 고정식 성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자기들이 성전에 가야 했다. 
평소에는 성전 아닌 곳에 있다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성전을 찾았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 살다가 

제사를 드릴 때만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교회 안에서는 신자다운 모습이 보이는데 

살아가는 모습은 신자답지 않은 모순이 나타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성전이 하나님이 계신 장소라면 

성전에서 하는 행위만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면 되기 때문이다. 
말로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종교 행위로만 나타난다. 
‘신앙’과 ‘생활’이 늘 따로 논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 그렇다.


<이스라엘왕조실록> p6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