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묵상하는 계절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번역해 봅니다.

 

                                 


(번역)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결코 자랑하지 않으며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나는 그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이 땅에 교회가 처음 생긴 것을 생각해 볼 때 유대인을 떠나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대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주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오늘의 성구 가운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행위와 믿음’ 중 ‘행위’를 그리고 ‘율법과 복음’ 중 ‘율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3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행위와 율법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이 육체로 자랑하려 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Not even those who are circumcised obey the law, yet they want you to be circumcised that they may boast about your flesh.”

 

할례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게 하려 한다는 의미는 할례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인치고 있다는 유대인들의 믿음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보았을 때 유대인들이 이처럼 ‘행위와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할례받은 그 육체, 곧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자랑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영어성경은 이것을 십자가 자체 “The cross”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in the cross” 곧 “십자가 안에서” 자랑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자랑할 수 있는데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자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단 유대인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의 습성은 죄로 인해 저주 받은 인간의 본성 때문이며 이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의 성구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이며

둘째는 세상의 십자가(the cross of the world)이며

세번째는 사도바울의 십자가(The cross of the Apostle Paul)입니다.

사도바울이 밝히고 있는 첫번째 십자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는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해 돌아가신대속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이천 년 전 본디오 빌라도의 선고로 예수께서 지셨던 십자가는 그가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지셨던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대속의 십자가였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는 세상이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the cross of the world)입니다.

이 십자가는 본문 안에서 “the world has been crucified to me” 라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말 성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직역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세상이 내게 못박혀 있어 왔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못 박히다(에스타우로타이)라고 하는 이 부분은 영역성경과 같은 현재 완료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그가 25년 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그 때부터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 줄곧 그 세상은 자신에 대하여 못 박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입니다. 세상은 무섭기도 하며 매력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를 향락으로 몰아 넣습니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하며 목표를 달성하는 기쁨을 누리게도 합니다. 영원한 것처럼 우리를 속이기도 합니다. 살맛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두 번째 십자가 위에  달려 죽은 모습으로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도바울에게 있어 그 세상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있는 무기력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는 사도바울의 십자가(The cross of the Apostle Paul)입니다.

오늘의 성구에서는 이것을 “and I to the world” 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바울에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있듯이 바울 또한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을 항하여 손짓하고 싶어도 손짓을 할 수 없고 더 이상 세상에 다가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커다란 못에 손과 발 모두가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피를 다 쏟아내어 세상을 향해 죽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이것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아름답게 꾸미고 금빛 찬란하게 가꾸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다 다이어나 화려한 보석을 박아 세워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그렇게 평가절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그 어려운 것도 나에게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도, 문제도, 너도, 나도 다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그 어떤 어려운 난제들 또한 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는 것입니다. 짊어져야 하는 것(Not a thing that I carry)이 아닌매 달리는 곳(A place where I hang on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또한 세상이 나에 대해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나도 그 세상과 문제들에 반응하지 않고 죽어야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죽으십시오.(장재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