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완벽은 흠이나 부족함이 없다는 뜻으로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그러기에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완전하고 완벽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완전과 완벽이라는 말이
주의라는 말과 합쳐져서 완전주의, 완벽주의가 되면
이런 말은 결코 좋은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된 권위는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 주지 않으니까
자기 스스로 권위를 만들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권위주의입니다.
진짜 권위는 없으면서
억지로 권위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강요하는 것이
권위주의라는 것입니다.
완전과 완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뜻은 참 좋지만 실제로는 완전과 완벽을 이룬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생기는 것이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입니다.
실제로는 완전하지 못한데도
완전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 완전주의이고 완벽주의입니다.
이런 완전주의, 완벽주의는
신앙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 빠지게 되면
완전하지 못하면서도 완전한 것처럼 행동을 해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은 시신을 안장한 곳입니다.
이런 무덤도 회칠을 하면 아주 하얗고 깨끗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얗고 깨끗하게 보여도
무덤은 결국 시신이 썩어서 악취를 내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완벽하게 지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보실 때는
오히려 시신이 썩어서 악취를 내는 무덤처럼
온갖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완전주의, 완벽주의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내가 완벽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시는 것도
내가 완전하고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주의와 완벽주의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도 조건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내가 완전하고 완벽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내가 완전하지 못하고 완벽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주의와 완벽주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분명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불완전하고 부족한데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완전하고 완벽했다면
결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만 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불완전하고 부족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완전하고 완벽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멀게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하나님과
좀 더 친숙하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이나 완벽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도 더욱 어렵고 더욱 멀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악순환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이런 완전주의나 완벽주의의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은 결코 두렵기만 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죄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또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 대가와 책임을 묻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완전주의와 완벽주의 때문에 하나님의 이런 모습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정말 무서운 분으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서
대가와 책임을 어떻게 물으셨습니까?
우리가 범한 죄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대가와 책임을 우리에게 직접 물으신 것이 아니라
독생자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통해서 대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코 무섭기만 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희생하셨으니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사랑이 많으신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무서운 분이 아니라 누구보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생각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완전과 완벽에 대한 기준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아무런 죄나 실수를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의 잘잘못을 감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부모는 모두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자녀 중에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모자라고 부족한 자녀도 있습니다.
그럼 부모는 이렇게 못난 자녀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무조건 미워하고 외면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가 않지요.
오히려 좀 부족한 자녀일수록 더욱 애틋해지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늘 우리를 감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풀어주신 사랑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어도
다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무서운 감시자가 아니라
부족한 것을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또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무슨 문제든지 기도도 더 많이 하고 성경도 더 많이 읽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도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점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은혜로운 말씀도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정죄의 말씀으로 보이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완전주의와 완벽주의에 빠진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고
그 하나님 앞에 완전하고 완벽한 것처럼 가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가장하고 꾸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완전하고 완벽한 것처럼 꾸미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희생하신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