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스도인은
너무 성실하고 너무 신실하기 때문에 위기가 없다.
문제의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주님과의 교제가 천편일률적이다.
때로는 실패도 하고 밑바닥에 떨어져 봐야
주님의 은혜도 알고 주님의 사랑도 알텐데...
(육신적인 삶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늘 너무 성실할 때 자신의 그 성실(신실함)이
주님 앞에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부지런 한 사람은 선을 행하는 데만 부지런 한 것이 아니라
죄를 행할 때도 부지런하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장점은 단점이기도 하다.
나의 장점이 나의 약점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의 교제에 공백이 생긴다.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육신의 문제가 주님 앞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교제인가?
나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나의 실패 나의 죄, 나의 문제, 나의 연약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하나님과의 교제에 진전이나 깊이가 생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의(성실, 신실)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자기로 채워지게 되면 자만과 교만이 가득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돌발적인 상황에서는
자기가 육신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항상 신실하고 항상 성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