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늙은 아이(old infants)인가?

아이들을 말할 때, '어린아이'라 말한다. 
어린아이의 모든 실수와 연약함은 용납된다. 
때로는 바지에다 실수를 해도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떼를 써도 
때로는 어른의 머리를 잡고 흔들어도 그냥 넘어간다. 
그것을 문제 삼는 어른은 없다. 
왜 그럴까? 어리니까... 아직 모든 면에 있어서 미숙하니까....

그렇다. 아이들의 특징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달라고 요구를 하지 않나? 
자기가 할일은 안하고, 너무도 당당히 권리만을 주장하지를 않나? 
시도 때도 없이 징징 대지를 않나? 
도무지 통제도 안 되고, 참을성도 없다. 
조금만 더워도 못참고, 조금만 배고파도 못 참고, 조금만 추워도 못 참고 
조금만 불편해도 못참는다. 그래서 어린아이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에는 어린아이보다 '어른아이'(old infants)가 
훨씬 더 증가하는 추세이다. 
애들 같은 어른들의 소식들을, 우리들은 매스컴을 통해서 보게 된다. 
홧김에 사람을 해치고, 홧김에 생명과 자녀들을 버리기도 한다.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는 어른아이가 있는가 하면 힘든 삶을 견디지 못하여, 
삶을 포기하는 어른아이도 많아져 간다.

어른아이의 문제는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초대교회 내에도 '어른아이'가 많았는가 보다.
바울은 늘 이 문제로 아파했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귀저기를 벗어버리지 못하는가 하며 
어른이 되었는데도 본능과 감정을 따라 행하기도 하며 
도무지 남을 배려하지 못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특징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본능적이다. 
배부르면 만족해하고, 많이 소유하면 좋아하고 빼앗기면 울고 
남이야 어떻든지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다. 
반면에 어린아이의 또 다른 특징은, 무럭무럭 자란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몇 년 안보다가 보면, 부쩍 커있는 사실에 놀란다. 
생명의 자람은, 필연이다. 자라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영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영은 자라야 한다. 
영아기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기 그리고 장년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자라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 
'늙은 아이(old infants)' 성도이다. 
겉은 어른인데, 영(속)은 아직도 아이수준이다. 
영의 지배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육과 감정에 통제는 받고 산다. 
편한 것만 추구하며, 언제나 안주하려 힘쓴다. 
나 편하고 나 잘 살면, 그만이다. 늙은 아이의 특징이다. 

아이들은 도무지 남의 대한 배려가 없다. 
아이들은, 미래에 대하여 갈망도 별로 없다. 
영혼에 대하여 무지하기도 하지만,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배부르고 tv 마음껏 보게 해 주면 그것으로 행복해 한다. 
끝없이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며 별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부리며, 
부모의 말씀을 들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딴 짓을 하며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할 때 극도로 삐진다.
 
늙은 아이(old infants)형, 성도가 이와 같다. 
끝도 없이 요구하며 인정받으려 하며 대접받기만을 원하며 지극히 본능적이며, 
혈기나 짜증조차 다스리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다르지 않다. 
바울은 이런 늙은 아이 형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언제까지 젖을 먹겠느냐?' 
어린아이는 딱딱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다. 죽이나 젖을 먹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늙은 아이 성도가 되면, 내 입맛에 맞는 음식만 섭취하게 된다. 
조금만 부담되거나 영적인 말씀을 들으면, 
부담을 느껴 섭취를 포기하고 잠들어 버린다. 
(예배시간이나, 말씀시간에 잘 조는 것이 특징) 부모의 영광과 기쁨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갈 때 부모의 시름은 사라진다. 
그러나 남의 아이가 자랄 때 자람을 멈추면, 
그것은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다. 
집안에 기르는 화초나 강아지도 안자라면 속상할 터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로써 자람을 멈춘다면, 그것은 속이 썩을 일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자랑이 아니듯, 오래 예수를 믿은 것은 자랑이 아니다.
 

그러나 철들어 가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듯 성숙해 가는 것을
보여 드리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빠르게 달려가듯 빠르게 예수를 믿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방향 설정이 틀렸다면,
느리게 감이 오히려 축복이다.
열심히 믿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르게 믿는 것이다.
열심히 믿는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고
바르게 믿는 것은, 성숙하여 가는 것이다.
성인이 되면 웬만한 건 참고 넘어가기도 하고,
나보다 남을 배려하게 되고 본능적인 것 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넉넉한 마음을 소유하기도 하며
지식보다 지혜를 욕심내기도 한다.
 

그러나 늙은 아이 형 성도들의 특징은 영적인 것을 위하여,
더 많은 희생이나 부담이나 대가를 치루려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안주하려는 것이 특징이다.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해하며,
더 이상의 영적성장이나 더 높은 차원의 세계를 갈망하지 않는다.
 겨우 겨우 주일을 지키거나 예배를 참석해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세상일과 육신의 일에 대하여는,
민감하여도 영적인 일이나 죄 문제에 대하여는, 둔감하기 그지없다.
 직장(학교, 세상)에서는, 펄펄 날다가도 교회에서는 풀이 죽는다.
찜질방에서는 평안(?)이 충만하지만
기도실에 들어가라 명하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진다.
늙은 아이들이 많은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많은 교회가
신선한 교회이며, 건강한 교회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어린아이들의 부흥이 아니라
늙은 아이들의 점점, 더 부흥되고 있는 것이다.
 속도는 빠르나, 방향은 없으며
꽃은 화려하나, 열매는 없으며
성장은 있으나, 성숙은 없으며
지식은 많으나 지혜는 없으며
불쏘시개는 있는데, 불은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가 아닐까?
 
주님이 원하시는 성숙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이다.
쉬지 말고 자라야 한다는 뜻이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듯이 자라지 않는 성도는,
늙은 아이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야할 세상은 영적전쟁이 심한 곳이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늙은 아이로는 안된다.
젊고 건강한 용사(?)들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다시 멈춘 성장을 시도해야 한다.
자라지 못한다는 것은 병들었다는 것이며,
잠들었다는 것이며, 안주한다는 것이며
머물기를 좋아 한다는 것이며,
편한 것만 추구한다는 뜻이며 희생을 안 한다는 뜻이며,
신령한 세계를 위하여 대가를 치루지 않겠다는 뜻이다.
 

배는 선착장에 묶어 두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성도는 세상에 속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배의 닷 줄을 풀어 깊은 바다로 나가야 하듯이,
 우리도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더 많은 고기를 잡게 될 것이다.
늙은 아이로 예수를 믿는 것,
그것은 마귀가 꿈에서도 바라는 것이다.
뚱뚱해진 것을, 성장한 것이라고 착각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뚱뚱해진 교회와 성도가 많아지는 요즈음,
성숙하고 건강한 교회와 성도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것이 초대교회로의 회복이 아닐까?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나는 성도들을 보고 놀란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대로,
'늙은아이' 성도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주여, 우리가 늙은 아이로 평생을 보내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나라 모든 교회들이 젊어지게 하시며
속도보다 방향을 성장보다 성숙에 집중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장성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철들어 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