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하루도 아니고 10년도 아닌
무려 38년 동안이나 병 낫기를 기다리고 있는 한 병자가 있었다.
38년 된 병자는 너무 오랫동안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절망의 포로가 되어 자기의 일생을 포기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응답도 없는데, 지금까지 치료받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약속의 말씀에 대하여 희망을 포기할 수도 있다.
만약 모든 희망을 접어버렸더라면
그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38년 된 병자는 비록 적합하지 않은 대답일지라도 솔직하게 꾸밈없이 대답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한복음 5:7절)
이때 예수님이 명령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
38년이나 된 병자, 무기력한 병자,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병자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한복음 5:9절)
그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반응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
결정적인 말씀에 즉시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요구할 때 믿음으로 그리고 순종으로 반응을 잘했기 때문이다.
요즘 현대인은 너무 조급하는 것이 문제다.
쉽게 좌절하고 만다. 쉽게 포기하고 만다. 쉽게 헤어지고 만다.
쉽게 판단해 버리고 만다. 쉽게 원수 되고 만다.
조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칼 융은 <조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귀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고귀한 생명을 포기해 버린다.
38년 동안 기다려 보았는가?
주님은 38년을 기다리는 병자에게, 38년을 거듭 버티고 있는 기업가에게,
38년을 기다릴 수 있는 목회자에게 크고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신다.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병든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이렇게 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동안이나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주님의 간절히 은혜를 사모했다.
하늘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축복은 소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38년 된 병자를 보라.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기다렸다.
절망의 파도가 계속 밀려오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소망은 무려 38년 동안이나 무너지지 않았다.
오직 인내와 기다림으로 승부를 걸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말과 동시에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
드디어 병자는 자리를 들고 일어났다.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38년의 기가 막힐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내로써 결정된다.
마지막 5분까지 견디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마지막 5분까지 견디는 자가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