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유난히
'고아와 과부와 객'에 대한 긍휼의 메시지가 많이 등장한다.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부모를 잃고 홀로 방황하는고아와
남편을 잃고 어찌할 줄 모르는 과부,
낯설고 물설은 이곳 저곳을 떠도는 나그네의
사는 모습이 그리도 "짠"하게 느껴지시나보다.
신명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
감람나무를 떨 때,
포도원에서 포도를 딸 때,
그럴 때에는 다 거두지 말고 조금씩 '남겨두라'는 메시지...
남겨진 곡식들은 하나님의 마음 한켠을 '아리게' 하는
고아와 과부와 객을 위한 "배려"로 사용하라시는 명령인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왜 '고아와 과부와 객'일까... 하는 생각...
그리고 언뜻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다 '고아와 과부와 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중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모를 잃는 '고아'가 된다.
어릴 때 잃든 나이 들어 잃든
우리는 모두 다 별 이변이 없는 한
먼저 부모를 떠나 보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경험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다 '나그네'의 체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낯선 환경이고
새로인 직장에 취업하는 것 또한 낯선 나그네의 환경이다.
교회를 옮겼을 때의 그 낯선 어색함이란...
우리 가운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무거운 인생의 무게로 인해 설움과 깊은 외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 또한
'과부'가 되어 삶의 막막함을 느끼게 되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우린 모두 다 고아와 과부와 객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고아와 과부와 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데
하나님이 입이 아프실 정도로 고아와 과부와 객을 챙기신다면,
그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서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아와 과부와 객을 챙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성경은, 이미 그들의 삶이 고아와 과부와 객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고아'였고
희망을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았던 '과부'였으며
피곤한 걸음들을 걸어야 하는 '나그네'였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다 고아와 과부와 객이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는 눈에 띄는 고아와 과부와 객이 있다.
우리 청년부가 왠지 낯설고 어색한 사람들...
새롭게 들어온 새가족들...
우리도 과거엔 "새가족"이었고
또 언젠가 우리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가족"이 될 수 있다.
우리 주변엔
현재의 삶의 무게로 인해 힘들어하는 과부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는
언제 어느 순간에 우리의 어깨를 짖누르는 그것으로 돌변할 지 모른다.
결국 우리는 서로 서로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감싸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바라는 모습...
그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예배할 때 보여지는 모습이 있다.
보고 싶지 않지만 보이는 모습...
그 축제의 예배를 혼자 앉아서 외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주일에는
그런 외로운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기대해본다.
우리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기쁨의 축제로서 예배하며
같은 '고아와 과부와 객'으로서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이
우리의 예배와 교제의 시간들을 가득히 채우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