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한 강의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죄없는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자를 
멈추게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수 없지 않느냐 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의자는 최고의 가치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강제로 되어진다면 무가치하다고 했습니다. 
로봇처럼 정해진 대로 말하고 정해진 대로 행하면 그속에 인간의 사랑은 없겠죠.

사랑의 가치는 자유롭게 선택할 때 빛을 발합니다. 
C.S루이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최고의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웃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억울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방아쇠를 멈추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강제가 된다면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빼앗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일은 거꾸로 자신의 자유의지도 파괴할 것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앞에 놓여진 상황만으로 행과 불행을 예단할 수 없습니다.

강의자는 동양의 우화를 예로 들었습니다.

기르는 말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것은 큰 손해였지요.
그런데 얼마후 그 말이 다른 말 열마리를 몰고 들어왔습니다. 
집나간 말로 좋은 일이 생긴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엔 말을 타다가 아들이 낙마를 해서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이 들어온 것은 불행이 되었습니다. 
얼마후 전쟁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징병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번엔 불행이 행운이 되었지요. 이를 전화위복 이라고 합니다.

당장의 눈에 보이는 현실로 우리의 행복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중한 가치는 변할 수 없고 
그것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확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본질상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는 거룩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육체의 죽음 넘어 
영원한 영적 생명을 얻는 축복을 얻게 되었지요. 
이로써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행복을 얻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그렇게 이웃과 연합하여 행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당장의 상황이 불행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십자가 사랑 안에서 즐거워하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희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했음을 깊이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3~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