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어려운 이유
이스라엘 민족이나 지금이나 성경이 어려운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내용의 실존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실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있어도 볼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와 계실 때에도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에는
많은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역시 세상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둠이 알지 못하더라(요 1:5)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투명인간이었거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지
시험하시기 위하여 위장을 하고 다니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존재’라는
자신만의 <그리스도의 상(象)>을 가지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상(象)’, 곧 ‘하나님의 아들은 이럴 것이다.’라며
자신들이 본 적도 없는 분의 정체성이
더 많이 가진 자가 선이 되는 세상의 법에 따라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설계되는 것에 대하여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용인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설계하고 정의내린
하나님 아들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도 짓지 않고, 똥도 누지 않을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죄인,
그것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설계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바로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란
그 단서들이 바로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개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상(象, image) 역시
그 때 그 마귀의 말과 100%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그 마귀의 말이
오늘도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 능력과 같이 세상 가치관으로 사는 이들이
흠모할 만한 어떤 것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움이 된다는 그 가치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가장 극형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가치관에 의하여 흉악범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흉악한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의 상(象)이나
또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도 도무지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 아들이라고 인정해 줄 만한 것이 없다는 이유 그 하나였습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것이 바로 “죄목”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에 대하여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절대로 어울릴 것이라 여겼던 죄인과 창녀와
세리(당시의 개념으로 매국노)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기는
각종 병자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은 더 많이 가지고 이루어야
선이 되는(세상적이든 종교적이든)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더라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바다 위를 걸으며 죽은 자를 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는데
자신들도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내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의사 면허가 없는 사람이 불치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있는 의사들의 심정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또 죽은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
또 육신이 바다 위를 걷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 같은 우리의 상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나 느끼지 못하는
문둥병을 고치기 위하여 오셨고,
또 하나님이 보실 때 도무지 그 창조 목적대로 살지 못하기에
죽은 것과 같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세상 가치관 속에서 살기에 바다 같은 세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이시기 위하여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고서 오해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안목으로 살다보니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이루는 것이 선한 것이기에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이룬 사람이 자기 위에 오르는 것을 인정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안목으로 낮아지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같습니다.
어떻게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있습니까?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방식(role)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대하여 더 많이 공부하고,
세상에서 더 많이 이루어낸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됩니다.
더 많은 공로와 소유를 가진 이를
자기 교회 목사로 청빙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과 간음한 상태인데,
그 안목으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다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괴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 믿는 것이 힘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기준은 뭔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 있어야
명함이라도 내 밀어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왕의 아들이나 제사장의 아들로 보낼 수 없어서
목수의 아들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또 설사 목수의 아들로 났다고 해도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취할 능력이 없어서 가나안에 사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뭐가 아쉽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법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육신은 어떤 조건이 붙은 육신이 아닙니다.
왕의 아들이어야 한다거나, 돈이 많아야 한다거나,
종교적 업적이 많아야 한다거나,
세상을 전쟁으로부터 구했다거나 하는
조건이 붙은 육신이 아니라 그냥 <육신>입니다.
정말 정말 단순하게 <육신>이라는 그 하나 뿐 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가져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물 위를 걷는 예수도,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는 그런 예수를 기대하고 조롱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는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되지 않으면 단언컨대 예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닌데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입니다.
이것은 아주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가 이상해지고,
예수님을 또 성경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은
오직 하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라는 그 자체 외에
그 어떤 하나라도 가져 간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하나를 알지 못해서 모든 곤고함과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알아야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나,
철학을 알아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하겠다는 것이 존중을 받고,
그런 지식이 있다고 교회에서 초청해서 말을 듣고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참담한 타락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 성경이 결합되는 것이 간음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고,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은 다 초등학문이라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바울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가지고
신앙의 쟁점으로 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상고한다는 것의
결국 나와 함께 살면서 그 속까지 다 아는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옆집 아저씨 아줌마와 같은 사람,
그리고 심지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저런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서 아들로 삼으신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 될 원재료와 같은 가능성으로 대할 수 있고,
그런 사람 중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인생의 목적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이 서로 대하게 될 그 때에
모든 성경이 쉬운 말씀, 그리고 달고 오묘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