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대상 4:9-10 제목: 구하는 사람이 되자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 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필요 충족을 하여 주므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어떤 사람은 비천하게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존귀하게 말입니다. 모두가 똑 같이 존귀함을 받고 살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한 집안의 형제들도 어떤 자식은 부모에게 인정받아 귀히 여김 받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반면 어떤 자식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귀히 여김 받지 못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기자는 말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라고
성경은 야베스가 누구의 아들인지 얼마나 살았는지 정확히 기록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그 형제들 보다 존귀한자였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란 사람은 왜 그 형제들보다 존귀함을 받았는지 본문을 통해 교훈을 받겠습니다.
먼저“야베스”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고통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기자는 야베스라는 사람이 태어난 기록을 "수고로이 낳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수고로이 낳았다는 말은 단순히 힘든 그런 뜻이 아니라 산모가 죽을 수도 있는 상태, 즉, 몹시 힘들고, 어려운 난산을 의미 하는 단어입니다.
아이를 출산 하면서 수고를 하지 않은 어머니들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도 아이를 출산 할 때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과 산후 처리 때문 이였습니다.
어떤 자료에서 본 것입니다. 산일이 되어 아이를 낳으려고 방으로 들어가는 임산부는 댓돌위에 벗어 놓은 신을 밖으로 향하여 가지런히 놓고 한 참을 본다고 합니다. 이유는 내가 아이를 무사히 낳고 벗어 놓은 저 신을 신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라고 합니다.
아마도 야베스의 어머니도 야베스를 낳을 때 너무 힘들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야베스(고통의 아들)라고 지었습니다.
이처럼 야베스는 태어 날 때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안겨준 야베스를 왜 성경은 모든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하였는가?
기자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무슨 말입니까?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 하는 사람 이였다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기자는 분명하게 증명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라고
무슨 말입니까? 야베스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하는 것을 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16:24절에서“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려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면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야베스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돈 많은 부자입니다.
그런데 돈이 꼭 필요한데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버지 제가 돈이 필요 합니다. 라고 하면서 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버지가 알아서 주시겠지 하고 아버지 얼굴만 보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알아서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돈 안 주십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돈 많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 돈 얼마만 주십시오! 라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돈이 많다고 해도 아버지께 구하지 않으면 필요한 돈은 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로 부르신 여러분!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부자인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하는 사람의 본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야베스는“하나님께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을 달라고 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실 줄 믿고 구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보채는 아이에게 젖 물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도 하나님께 야베스처럼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을 위해 쓰려고 합니다. 그러니 주십시오! 라고 보채야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복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물질 또는 권력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야베스는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자로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야말로 복중의 복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산다는 것이 복중의 가장 큰 복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이는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자녀가 부모 앞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 앞에 사는 자녀는 걱정, 근심, 염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하는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 하시면 무엇이든지 주십니다. 그러므로 굳이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돈, 권력, 명예, 인기, 건강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 확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모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7~8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라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하면 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 4:2절에서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구하면 줄 텐데 너희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 복음 전하는 일을 하려고 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 말씀을 명심 하시고 하나님께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야베스는 고통 속에서 시작했지만 야베스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하나님 저에게 복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마태 7:1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는 주시지만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구하고, 구하지 않고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으신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하면 반드시 주신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단,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려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 4:3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라고
두 번째는“나의 지경을 넓히시고”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야베스가 살던 지역은 주변국들의 잦은 침략을 받았던 지역 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나 우리나라 역사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도 솔로몬 이후 주변국들에 의해 잦은 침략을 당했고, 우리나라 역시도 주변국들에 의해 잦은 침략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할지 모르지만 약소국가인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 만큼 사는 것은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이 보우하사 오늘에 이르렀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이름 없는 누군가가 오늘도 기도 골방에서 또는 삶에 현장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누군가의 기도를 들으시고 보우하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야베스는 이방인의 침입을 막아 달라고 기도 하지 않고 지경을 넓혀 달라는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하나님 이방인들의 침략을 막아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였을 텐데, 야베스는 침략을 막아주세요! 라고 기도 하지 않고 침략한 적들을 무찔러 적들의 땅이 자기 국가에 편입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야베스의 이러한 점이 저와 다른 점이고 이러한 점 때문에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존귀한 자라고 불림 받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나약한 방어적 기도가 아니라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기도를 한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이 구한 것을 들어 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방어적 기도를 하십니까? 아니면 야베스처럼 공격적인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의 가장 무서운 적은 현재의 안주입니다. 뭐! 이 정도면 되지 않겠어! 라는 생각 말입니다.
고전 10:1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라고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방어만 하는 신앙생활과 그리고 공격하는 신앙생활,
군 전략가들은 말합니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라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이 자리에 부르신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능력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아 공격적인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영광 받으시려고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는“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주님의 손이 늘 나와 함께 계셔서 모든 불행과 고통을 멀리 없애 주소서”라고
사람들은 인생을 고해라고 합니다. 즉, 고통에 바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조그만 배로 넓고, 넓은 바다를 항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인생이라는 항해에 따스한 햇볕에 적당한 바람만 불어 주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창한 날씨가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과 함께 세찬 바람이 불어 거센 풍랑을 일으키고 그리고 마침내 앞이 보이지 않는 비바람 또는 눈보라가 몰아쳐 인생이라는 조그만 배는 침몰 직전에 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침몰되기도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
야베스의 이 기도를 묵상해 보면 야베스는 현재 자기 자신의 삶이 환난과 근심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국들의 잦은 침략과 이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인 혼란, 즉, 살상과 방화에 의한 환난과 근심, 식량 약탈로 인한 궁핍한 경제 문제 등으로 인한 고통,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인생의 배가 거센 풍랑과 앞이 안 보이는 비바람에 의해 침몰 되고 있으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라는 말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렘 33:3절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환난이 오고 근심되는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붙들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그리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 찾아온 환난이나 근심되는 일에서 벗어나면 기도를 멈춥니다.
인생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 되려고 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 받았으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더욱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종교인에 불과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난이나 근심에서 벗어난 일이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벗어 난 줄 착각 합니다.
이런 종교인의 목이 뻣뻣해지며 마침내 마음에는 교만이 싹틉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살다가 다시 부도라는 환난, 이혼이라는 환난, 병이라는 환난을 당하고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잘 나아가고 있을 때 끊임없이 쉬지 말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데전 5:17절에서 이렇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고
여기서 잠깐 환난이라는 뜻을 생각 해 보겠습니다. 환난이란 말은 헬라어로“들맆세신”(θλιψεσι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 듯 한 수고와 슬픔과 고통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책에서는 이 환난을 이렇게 설명 하였습니다. "굶주린 지친 사자와 칼을 놓친 검투사"라고
굶주림에 사나워진 사자와 검투사가 로마 콜로세움 경기장에 섰습니다. 사자는 굶주림에 지쳐 있기 때문에 검투사를 잡아먹어야 했고, 그리고 검투사는 사자를 죽여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검투사와 사자는 경기장을 돌면서 팽팽하게 대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검투사가 그만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자는 검투사를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검투사는 어렵게 칼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굶주림에 사나워진 사자는 이미 코앞에 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물리치기에 너무 늦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 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환난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설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환난, 위기 상황은 늘 존재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그리스도인 특권입니다.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코앞에 와 있는 굶주린 사자를 보고 기도 하지 마시고, 일상 속에서 기도로 구하는 일을 생활화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저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제가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우리는 우리 주변에 늘 환난이라는 굶주림에 지친 사자, 유혹이라는 사자가 우리를 삼키려고 으르렁 거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5: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 6:13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우리를 유혹(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도 하지 않으면, 구하지 않으면 어느 틈에 성령의 불은 소멸 되고 만다는 것을... 성령의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면 말씀이라는 장작, 기도라는 장작, 찬송이라는 장작을 부지런히 내 심령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여러분! 야베스처럼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야베스처럼 지경을 넓혀 달라고 공격적인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야베스처럼 나를 도와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야베스처럼“그 형제들 보다 존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를 존귀케 여기십니다. 존귀케 여긴다는 말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2:9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존귀한 자들입니다.
택함 받은 존귀한 성도들은 하나님과 기도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택함 받은 존귀한 성도들은 하나님과 기도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택함 받은 존귀한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능력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기도로서 대화와 교제와 능력을 받은 성도들은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 까지도 사랑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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