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시간을 드려라
아마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발견되는 가장 보편적이고 계속되는 문제는 영적 성장의 지체일 것이다. 왜 신앙을 고백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 믿을 때와 똑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성장이 더딘 원인은 많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원인을 단 하나의 잘못에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원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데 있다.” 오늘날 구원에 관한 신앙은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단번에 이루어진 행위로 축소되었다. 신앙이 어린 신자들은 그들이 따라야 하고 경배해야 할 살아 계신 구주를 알기보다는 이미 완료된 하나의 행위를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강함과 약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체득했는가에 달려 있다. 신앙의 성장은 우리 개인의 체험 속에서 얻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성장에 비례한다. 이러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전생애를 바쳐야 한다. 거룩해지는 데는 지름길이 없다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영적 생활의 전환기조차도 보통 오랫동안의 사색과 기도 중의 명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천천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기다리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영적 생활에서 어떤 것은 등한히 해도 별로 손해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한다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알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상당한 보상을 주신다. 이것은 이 거룩한 과업을 위하여 우리가 얼마만큼 결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쉽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분이시고 그의 역사는 한없이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은 온통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신뢰하는 자는 이 사랑 이외에는 결코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는 진실로 공의로우시며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지 아니하시지만, 그러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인하여 마치 우리가 전혀 범죄하지 않은 것처럼 대해 주신다.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의 인자가 공의를 항상 이길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다. 하나님은 쉽게 구원받은 자들과 교제하시며, 영혼에 평안과 회복을 주는 제약받지 않는 교제를 하신다. 그는 예민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으며 엄격하지 않다. 오늘의 하나님은 내일도 동일하시며 모래도 내년에도 동일하시다. 그를 만족시키기는 어렵지만 기쁘시게 해드리기에 힘든 분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서 처음 그 자신을 준 것밖에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를 기쁘시게 하는 개개의 단순한 노력을 즉시 기록하시고, 우리가 그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을 아시는 즉시 우리의 불완전함을 간과해 버리신다. 그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의 사랑을 새로 창조된 세계의 은하수보다 더 가치 있게 보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은 함께 생활하기 쉬운 분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우리의 구조를 기억하시며 우리가 흙이라는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미소를 지으시며, 즉 비록 불완전하지만 약속받은 아들이 더욱더 자기 아버지를 닮아보고자 매일매일 찾아나오는 모습을 보시고 기쁨을 금치 못해 자랑스러워하시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시며 징계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하게 만들려고 미친 듯이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불완전한 것을 가진 채 우리 자신을 그의 팔에 내어 맡기고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의 조언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의 말은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 누구든지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는 자는 조언을 할 자격이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의 조언을 따르려는 자세가 갖추어 있지 않은 자는 다른 사람을 상담해 줄 권리가 없다. 진정한 도덕적 지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의 메아리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길의 가장 안전한 빛은 세상의 빛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반사된 빛이다. 특히 청년들은 누구의 조언을 신뢰할지를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세상을 살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들은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알든 모르든 매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들이 갖추고 있는 현재의 인격은 그들이 따른 조언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따르기 이전에 그 사람의 얼굴에 아첨하는 기색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십자가 표시가 없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활동을 협조해야 하는 영적 의무가 전혀 없다.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어떠한 간청이나 동정을 유발하는 이야기나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세워 놓은 계획에 우리의 돈이나 시간을 바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의 선민을 세상에 두시는데, 이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들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의 말을 우리는 안심하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외의 사람의 말은 들어서는 안 된다.
신격화된 오락
사람의 마음에 가진 것이 많으면 외부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이 적어진다고 했다. 외부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것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속사람의 파산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현재 온갖 종류의 엄청난 오락들은 현대인의 내적 생명이 심각하게 치우쳐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도덕적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중심이 없으며, 가슴속에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를 주는, 즉 계속적으로 마음을 자극하는 필요를 초월한 원천도 없으며, 내적인 힘도 없다. 인간은 세상의 기생충이 되어 자기의 환경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들이며 사회가 제공하는 자극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다. 해독이 없는 것을 남용하는 것은 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생활에서 오락 부문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요, 현대인의 영혼에 위협에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마음과 인격을 사로잡으려고 세상의 그 어떤 교육적 영향력보다 더 오락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그런데 불길한 것은 그 힘은 매우 약하여 내적생명을 부패케 하고, 인간들이 그 즐거움에 빠져들게 되면 인간의 영혼을 채울 영원한 생각은 밀려나게 된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는 모든 형태의 세속적 오락을 전적으로 반대해 왔다. 즉 세속적 오락은 시간 낭비요, 귀찮은 양심의 소리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며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계략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의 아들들에게 여러모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교회는 비난받는 것에 지친 듯 그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신격화된 오락을 정복할 수 없다면 그 힘에 합세하여 그 힘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소위 하늘의 아들들을 위한 세속적 오락을 마련하는 가증스런 일에 수백만 달러를 투입하는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종교적인 오락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에 관한 심각한 것들을 과격하게 밀쳐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이 때에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종교적 오락에 탐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며 기이한 현상이 아닌가? 많은 성숙한 신자가 필요한 이 때에 영적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종교적 장난감 때문에 아우성쳐야만 하겠는가?
성경의 가르침인가, 성령의 가르침인가?
진정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라는 것을 우리 마음에 항상 간직해야만 한다. 영적인 것은 잉크로 가두어 둘 수 없고, 타이프나 종이로 울타리를 쳐놓을 수도 없다. 한 권의 책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에게 진리의 글을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보다 더한 것을 얻는다면 그것은 그 글을 주신 성령에 의하여 얻는 것이다. 영적 기갈을 느끼는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제일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떠나서는 우리 주님께서 구원의 진리를 주시지 않는다. 그 다음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성령을 떠나서는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함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죄인의 마음에 두려움을 갖다 주었다. 이것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육체적 해를 두려워하는 육체적 본능의 정상적인 반응의 하나로서 체험하는 공포라기보다는 인간의 깊은 중심, 즉 본성 중심에서 체험하는 일종의 경외심이다. 이와 같은 피조물의 두려움에 근거를 두지 않은 종교적 활동에서는 결정적인 선이 나올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불결한 피조물이 갑자기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만날 때 빚어지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신약 복음이 선포하는 사랑과 은혜의 교리에 많은 영향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속적인 마음에는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느끼기 전에는 아마 하나님과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회중은 목사나 교회의 지도자가 성령으로 충만해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이 같은 신비로운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개혁 없는 중생은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편에서의 용서는 사람 편에서의 개혁을 일으키려는 조건으로 주어진다. 도덕적 개혁이 있을 때까지는 영적 중생이 있을 수 없다. 회심한 사람은 개혁도 되고 중생도 된 사람이다. 그리고 죄인이 자기의 생활 방식을 기꺼이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중생의 내적 체험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인기 있는 복음주의 신학의 나무 밑에서 잃어버린바 된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 용서는 받았지만 아직도 죄를 사랑하고 의로운 길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이뿐 아니라 회개하지도 않고 생활 방식에 아무 변화도 없는 죄인들로 채둬진 천국을 상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인가? 성경에는 용서와 죄를 깨끗게 하겠다는 약속이 언제나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연결되어 나온다. 어떤 용서를 기대하려면 먼저 생활의 근본적인 개혁이 앞서야 한다. 이 말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성경을 범하는 것이요, 진리를 거짓되게 취급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회개 없는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도덕적 표준을 저하시키는 것이며, 여전히 쓰디쓴 쓸개 속에 잇고 죄악의 속박 아래 있으면서 구원받았다고 잘못 믿고 있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런 사람에게서 더 깊은 생활을 추구하는지를 찾아본다면 환멸을 느끼게 될 뿐일 것이다.
믿음은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믿음은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임을 사람들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뒤로 물러 갈 수 없는 자리에 자신을 고정시켜 둔 사람만이 진정한 성경적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그의 믿음은 영원하고 변개할 수 없는 위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아무리 심한 시험을 받아도 그는 언제나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만 의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을 뿐 다른 방도는 없다.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명령할 수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고 단지 거짓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실패하시면 빠져나갈 길을 마련한다. 참 믿음은 한 길밖에 모르며, 제 이의 길이나 임시변통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빼앗긴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참 믿음은 하나님 아니면 전적인 실패 중 하나이다. 아담이 이 땅 위에 창조된 이후,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지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나 여자의 기대를 저버리신 일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때가 우리 각자에게 기필코 닥칠 것이다. 건강과 재물과 친구와 피난처는 다 쓸어버림을 당하고 우리는 하나님만 소유하게 될 것이다. 거짓 신앙인에게는 이것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상이요, 참 신앙인에게는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모든 그릇된 신뢰를 제거하고, 모든 피난처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가 과연 실제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넓은 곳으로 들어가려면, 지금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족은 우리의 대적
영적인 것에 관한 한 확실히 만족은 하나의 악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세상 것에 대해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였다. 이것은 영적 소득에 만족하는 것과는 다르다. 영적 소득에 관한 한 그는 만족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상 것에 만족하는 것은 성도의 표징이다. 자기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는 것은 내적 소경의 표징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적 중 하나는 신앙적 만족이다. 우리의 덫은, 도달하지 못했는데도 도달한 것처럼 믿는 것이다. 정통적인 기독교는 영적 갈급함의 결여로 현재의 낮은 위치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극단을 두려워하며 감당 못할 사랑과 감당 못할 믿음과 감당 못할 성결을 갖게 될까봐 지나친 신앙 열심은 피한다. 여기에 머물지 말라. 하나님의 깊은 것들 속으로 계속 들어가라. 더 깊은 구원의 신비를 맛보기를 힘쓰라. 우리의 발은 땅에 붙어 있으나 우리의 마음은 원하는 대로 높이 날게 하라. 보통 수준의 영적 상태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냉랭한 영적 환경을 제거하라. 만일 우리가 이것을 “추구한다면” 천국은 틀림없이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이고,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환상을 볼 것이다.
십자가는 급진적인 것
십자가는 반대자를 패배시키고 그의 뜻을 관철시킴으로써 이긴다. 십자가는 언제나 지배한다. 십자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협상하거나 협의하거나 평화를 위해 일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평화를 걱정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대적을 해치우기를 원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아시는 그리스도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끝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진실로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처음 생명, 옛 생명을 끝낸다. 십자가는 신자의 삶 속에 있는 옛 틀, 아담의 틀을 파괴하고 끝장나게 한다. 이런 연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처럼 신자들을 일으키사 새 생명을 주신다. 그러나 십자가가 죽음을 상징하는 것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바뀌자 그 능력은 떠나 버렸다. 오늘날에는 십자가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가 숭배되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든지 아니면 그 위에서 죽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현명하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행하자, 십자가를 참고 견디며 우리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를 가볍게 보자.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모든 패턴이 바뀌게 되고 끝없는 생명의 능력 안에서 다시 세움을 받게 된다. 그러면 십자가는 시(詩) 이상의 것이요 감미로운 찬송가 이상의 것이며 유쾌한 감정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찔러 쪼개어 심한 상처를 내게 하며, 우리 자신이나 애써 만든 우리의 명성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려 육체적 삶에 종지부를 찍게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만이 전적으로 새롭고 자유로우며 선행으로 가득한 삶의 패턴을 만드는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살기 원하면 죽어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 죽으려는 것! 여기엔 어떤 모순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는데, 추구해야 할 죽음과 있는 힘을 다해 피해야 할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십자가와 왕좌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십자가에 두기 전까지는 왕좌에 앉아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성도들이 귀중히 여겨오던 보화 중 많은 것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우리의 육체는, 마음의 순결과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 영적 통찰력과 열매 맺는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것이다. 이 모든 것보다 그것은 세상의 빛이요 천국의 완성이 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가 보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얼굴을 가릴 것이다.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라
기도는 삶 전체의 표현이다. 당신은 더 만족스러운 기도 생활을 알기 원할 것이다. 몸과 마음의 모든 행동을 고매하고 순결하게 해 주고 전 인격을 영과 하나 되게 해 주는 기도 생활을 바랄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오로지 성령 안에서 살 때만 가능하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 힘이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모든 생각과 행동이 기도가 될 때 지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탁월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 생애는 찬송과 예배의 거룩한 제사가 될 것이다. 기도를 효과적으로 하려면 우리의 생활에 복되지 못한 곳이 없어야 하고 마음과 영혼에 성령이 거하지 않는 부분이 없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내적 생활에 불순한 욕구가 없어야 하며 기도와 행동이 일치되어야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전 생애가 기도가 되어 순결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기에 충분한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삶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개개인의 기도에는, 무관심한 자들이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능력이 따를 것이다.
주님 되심 없이는 구주 되심도 없다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구체화되어 있고, 이것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어느 한 가지라도 다른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도움을 구하러 그리스도께 왔으나 그에게 순종하려는 의향이 없는 사람이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은 그의 주님 되심과 영원히 연합되어 있다. 다음 말씀을 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9~13)
여기서 주님은 구원을 위한 신앙의 대상이다. 빌립보의 간수가 구원얻는 방도를 물었을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였다. 바울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은 나중에 받아들여도 되니 우선 구주를 머리로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직분을 나누어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기가 중요하다
특히 활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동기가 확실한지 영혼을 살피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만 한다. 많은 독창자들은 보이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많은 설교들이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행해지고, 많은 교회들이 다른 교회를 비난하기 위해 세워지고 있다. 심지어 선교 활동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고 있으며, 영혼 구원은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사업으로 전락되어 가는 것 같다. 바리새인들도 회심시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다녔던 것을 잊지 말라. 공허한 신앙 활동의 올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자주 묵상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성경 말씀 중 매우 아름다운 말씀이지만, 또한 성경 중에서 발견되는 가장 엄한 말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도는 최고의 신앙적인 봉사라도 그것에 사랑의 동기가 없는 한 무용한 것이라고 했다. 사랑이 없는 선지자, 교사, 웅변가, 박애주의자, 순교자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한 그 행위가 그것을 하게 한 동기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판대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몸으로 행한 행위를 설명해야 할 때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아니라 왜가 될 것이다.
프로그램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임재
만일 우리 각자가 예배 시에 복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면 우리 교회들은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헌신의 가장 중요하고 변치 않는 대상으로 삼는다면, 프로그램은 하나님께 드리는 공중 예배의 질서를 돕는 고상한 도구가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프로그램은 결국 빛 되신 하나님을 완전히 가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빛을 비출 수 없게 될 것이다.
황야의 황폐해짐
자연은 비옥한 들보다는 황무지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타락한 모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이다. 모든 것은 황폐해지려는 경향이 있고, 개발 후에도 다시 황폐한 상태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다. 타락한 세상의 도덕적 경향은 경건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경성과 계속적인 기도만이 하나님의 은혜 사역으로 얻게 되는 도덕적 소득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태한 마음은 곧 세속적인 생각들로 압도당하게 될 것이며, 게으른 생활은 얼마 안 되어 도덕적 혼돈을 야기시킬 것이다. 강력한 기도와 희생적 노력으로 열심히 지켜지지 않는 교회는 불원간에 모든 악한 새들의 소굴이 되고 생각지도 않은 부패의 피신처가 될 것이다. 기어드는 황폐함은 경성과 기도를 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교회를 순식간에 뒤덮고 말 것이다. 황폐해지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타락한 세상 전역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 안정된 나라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도 작용한다. 그러므로 교육과 세심한 교회 조직을 배려하지 않고 이 나라 저 나라 전전하며 복음 전파하는 것으로서 선교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복음주의 교회의 많은 기관에 영향을 주어 열심 있는 사람들을 시켜 날치기 방법으로 세계를 복음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회심자들을 적절한 보살핌 없이 그들 멋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마치 이제 갓 태어난 어린양들을 황야의 한복판에 방치해 두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이것은 잡초 무성한 황무지에 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고는 이것을 거친 자연의 긍휼에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은 노력만 낭비하는 것이 될 것이며 진정한 수확은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열매가 우리의 인격을 말해 준다
사람의 인격은 그의 관심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집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실제적이 되려면 친화력의 놀라운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친화력을 나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이 끌리는 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인간의 마음은 지극히 민감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금지된 대상과 더불어 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도 비록 거리나 시간상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은밀한 사랑에 진실할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지는 우리의 사고가 일이나 공부의 심한 구속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가 무엇을 생각 하는지로 알 수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우리는 보통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우리가 곰곰이 생각할 때 무엇이 우리에게 내적인 즐거움을 주는가? 우리는 자유 시간에 무엇을 명상하는가? 우리의 계속되는 상상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우리의 인격이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인격을 소유한지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가 맺게 될 열매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호와 앞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아갈 아무런 도덕적 권한도 없다. 먼저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지자는 대중 앞에서 설교하는 시간보다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인간의 마음의 끌리는 힘을 감히 간과해 버릴 수 없듯이, 영적 마음가짐의 중요성도 감히 무시할 수 없다. 마음가짐은 정신적인 날씨와 같다. 들이 비와 햇빛과 더불어 친밀하게 호흡하며 사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를 배워야 한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영적인 일에 소홀해 온 것을 순식간에 보충할 수는 없다. 매일매일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먼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협소한 영혼의 집
우주 가운데 제일 넓은 곳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잠재력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므로 마음은 어느 방향으로든지 거의 무한하게 연장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자기 이외에는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오그라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특히 그리스도인은 가장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좁히는 것은 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이다. 그들은 내부의 광범위함을 외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내적 확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외적으로는 크고 내적으로 작은 것은 위선이다. 그러나 소박한 외적인 것 밑에 넓은 내적인 것을 숨기는 겸손은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게 되면 분명히 도량이 넓어진다. 만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면 우리는 놀라운 확장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손을 떼고 하나님의 역사에 맡긴다면 그가 무엇을 하실지 누가 알겠는가?
성화된 욕구
사람이 어떤 욕구를 갖느냐에 따라 그의 인격이 결정된다. 우리의 지배적인 욕구가 악하면 우리의 전체 생활도 결과적으로 악하게 된다. 욕구가 선하면 생활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우리의 욕구의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모든 진정한 영적 성장의 뿌리에는 의롭고 성화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성경은 두말할 것 없이, 만일 우리의 욕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과 거룩을 추구하는 욕구는 모든 진정한 영성의 뼈대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가 생활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유하게 되는 것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욕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성장을 멈추게 할 것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정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안전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욕구를 갖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성경으로 하여금 판단케 하자.
장애물에 대하여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고정시켜라. 그러면 그 즉시 그는 자유로운 것이다. 아무도 그를 방해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유일한 의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영적 평온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도입시킬 때이다. 우리가 자신의 이기적 욕망으로 삶의 옷감을 짠다면, 우리는 그 즉시 외부로부터 오는 방해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영적 예배(신령한 예배)의 요소는 지극히 사랑하는 것, 굳게 신뢰하는 것,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구하는 것, 거룩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천 사항”은 어느 누구도 결코 방해할 수 없다.
고난의 효용
그리스도가 당하지 않은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없다. 우리 주님은 지상에서 한 번만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계신다.
보지 못한 분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로부터 순종함을 받아야 할 존재이시다. 인간은 순종을 바치기 위해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는 불순종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당연한 요구를 어긴 것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서 죽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의 마음에 사랑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냉담했음을 슬퍼하는 마음에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롭고 뜨거우며 만족스러운 사랑이 그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행위는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행동, 즉 자기 계시와 친밀한 교통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를 사랑하는 일에 관한 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를 더 잘 아는 것이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추악한 죄의 문제를 처리해 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임재의 교리를 아무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는 못하나 수없는 내적 면회로 하나님을 체험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못하였으나 그분은 내가 사랑하는 분이다”라고 확신할 수 있다.
머리는 냉철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인식하고 피해야 할 정반대되는 두 가지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찬 마음과 뜨거운 머리다. 이 둘 중 치명적인 해독을 끼치는 것은 뜨거운 머리다. 교회의 부흥 역사를 보면 뜨거운 머리가 얼마나 해로운지를 잘 알 수 있다. 부흥을 추진시키는 사람이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기 어렵다. 어떤 영적 운동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범주에서 벗어나 비대해질 때, 위험은 시작된다. 하나님의 뜨거운 불이 구원받은 사람의 지성에 부딪힐 때는 차다. 이것이 마음은 불타게 하지만 판단력은 완전히 침착한 상태에 머물게 한다. 용광로는 뜨겁게, 그러나 굴뚝은 차게!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분을 지극히 사랑하고, 그가 볼 수 없는 어떤 분과 더불어 매일 친근하게 대화하며, 다른 분 덕분에 천국에 갈 것을 바라고, 채워지기 위해 자신을 비우며, 자기의 잘못을 시인해야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고, 일어서기 위해 내려앉으며, 가장 약할 때에 가장 강하고, 가장 가난할 때 가장 부요하며, 가장 불행하다고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는 죽음으로써 살 수 있고, 소유하기 위해 버리며, 간직하기 위해 나누어주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명철을 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무엇을 찾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이미 찾았다. 그는 빛을 찾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미 빛이 비치었다. 그의 확실성은 고집불통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경험으로 터득한 확실성이다. 그의 신앙은 소문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손에서 나온 원본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세상의 일반 대준의 진보라고 강매하는 치열한 쟁탈전에서부터 구출될 수 있다. 경성하자. 우리는 혼란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결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게 할 일련의 사건이 시작됨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분명히 나중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는 꽤 많은 발언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처음과 마지막은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그리고 이것만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결코 양보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출생 시간과 장소에 관한 한 발언권이 없다. 작은 인간이여, 너는 단지 처음과 나중의 중간에서 재잘대며 지껄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처음에도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나중에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는 그가 처음 시작한 것과 같이 나중에도 좌지우지하실 권리가 있으시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너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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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토저, [경건생활의 기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