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발가락의 기적
"세대 간 계급화가 곪아가는 지금, 75세 청년 박운서의 끝없는 도전"
세대 간에도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있는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60대들이
모이면 외치는 건배사가 있다고 한다.
“70대를 극복하자!”
이 건배사의 끝은 이명박 정부의 ‘6인 원로회의’, 박근혜 정부의 ‘7인회’에 닿아 있다.
이제 50이 되는 나도 스스로를 ‘얼라’로 느낄 만큼 세대의 계급화 현상은 곪아가고 있다.
지난주 조금 특별한 70대를 만났다. 서울 베스티안병원 6층 병실 문을 열자 병원 특유의
나른한 공기가 밀려왔다. 짧게 머리를 깎은 백발의 남자가 침상에 걸터앉아 있다 나를 돌아봤다.
박운서(76). 행정고시, 통상산업부 차관,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 데이콤 회장….
필리핀 민도로섬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운서 전 차관. 민도로섬은 마닐라에서 차로 두 시간, 배로 세 시간을 가야 닿을 수 있다. 지난 10여년간 박 전 차관이 활동해온 망얀족 거주 지역은 다시 서너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다. [사진 모리아자립선교재단 제공]
그의 40년 경력은 녹색 환자복을 걸친 비쩍 마른 몸이나 움푹 팬 볼과 어울리지 않았다.
경상도 억양의 그가 끔찍한 사고를 당한 건 지난해 4월 19일이었다. 필리핀에서도 오지로 불리는
민도로섬에서 트럭이 전복되면서 비탈로 굴렀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체 조수석에서 그를 끌어냈을
때 하반신 곳곳이 참혹하게 부서지고 살점들이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그는 5월 2일 의식불명인 채로 서울로 후송됐다. 들것에 실려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현지 의료진은
괴사한 발가락들을 절단했다.
박운서 전 차관이 교통사고 후 마닐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은 뒤 비행기에 실려 서울로 후송되고 있다.
그가 의식을 찾았을 때 양쪽 무릎과 정강이에 철심이 박히고, 요도엔 평생 달고 살아야 할 도뇨관이
있었다. 오른발은 엄지발가락 뿐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가 집을 교회에 헌납하고 민도로섬 밀림에 들어간 건 65세 정년을 맞은
2005년 여름이었다. 그는 15ha의 땅을 사들여 벼농사를 지었다. 농작물 재배법 책을 펴 들고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2.5모작으로 연간 4000여 가마를 수확했다.
그 쌀로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망얀족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교회 14곳을 세우고,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 물탱크에서 떨어져 발목뼈가 부러지고 권총 강도를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인 건 오른발에 엄지발가락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마저 없었다면 목발을 짚고 서기
어려웠다.
그는 특수 제작된 신발을 신고 매일 오전, 오후, 저녁 30분씩 바이크 운동을 하고 있다.
틈날 때마다 병원 복도에서 걷기 연습을 한다. 하루빨리 민도로섬에 가기 위해서다.
도뇨관을 갈아줄 현지 병원도 확보해놓았다.
그날 내가 기적이라 느낀 건 단순히 발가락 하나가 온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일어서서 봉사와 선교의 땅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기적이었다.
박운서 전 차관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바이크를 타며 재활 운동을 하고 있다. 그가 신은 오른쪽 신발은
엄지발가락만 끼어넣을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것이다.
그의 의지는 오직 신을 향한 신앙심일까. 그는 지난해 펴낸 책에서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는 병실을 나오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있다는 걸
보여주셔서...
76세 청년은 53kg의 몸을 일으켜 손사래를 쳤다. 아입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요.
정말 내 얘기 안 쓰면 안 됩니까.
[출처: 중앙일보] [권석천의 시시각각] 엄지발가락의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