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그분의 지배 아래서의 삶이다


우리는 일거수일투족 사사건건 모든 삶을 성령의 지배 아래서 살고 있다.



고층건물을 이용할 때 엘리베이터을 이용한다.

내가 원하는 층을 누르면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내가 가자는 대로 갈 뿐이다.

내가 원하는 층에 멎는다.

언제 누른 데로 가지 않는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이렇게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면서

성령 보혜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상기하면 그렇지 못한 때가 너무 많음을 고백하게 된다.

내 주장과 내 뜻, 내 지능이 앞설 때는 벌써 내 마음대로 앞서 작용하게 되니, 


성령의 지배를 벗어난 것이다.

이는 방자함이며 방종함이 된다.



사도 바울은 자기 역사를 아시아에서 지속하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성령의 강한 지시가 


있었다. 마게도냐로 역사를 옮겨 복음이 유럽에서 크게 역사하여 신대륙을 거쳐 아시아로 


들어갔음을 역사를 통해 보았다.


바울은 자기가 뜻한 대로라면 아시아에서 역사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성령의 역사로 그 역사를 옮겨야 했다.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하는데, 내 육아(肉我)는 내 생각과 타산, 지능으로 하려는 데서 


보혜사의 지배를 배제하게 된다.

내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보겠다고 하다가 결국 믿음도 '내가 믿자'라는 식으로 


되어 버린다.



'내가'가 끼어들면 보혜사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게 되고, 이로써 믿음의 역사가 중단된다.

이는 절대 믿음이 아니다.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미로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방지일 지음』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