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가운데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그러면 우리가 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는가?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마귀는 꽃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만들고,

오직 그 주변의 죽은 땅과 죽은 것을 묘사하고 그 누추함에 대해 떠든다.

 

“잘 봐. 이렇게 넓은 땅에 생명은 꽃 한 송이밖에 없고 대부분이 죽음 아니냐?”


마귀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아무리 금이 많이 나오는 금광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금보다는 흙과 돌이 더 많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이 금광을 발견했을 때, 그 광산 안에 있는 금을 바라보고 “우아! 금광이다!”라고 하지,

거기 있는 흙을 바라보고 “이건 흙 광산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금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구원받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뜨린다.
그는 우리가 생명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 대신 밤낮 죽음만 바라보게 만들고, 흙만 바라보게 만든다.
누추함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죄만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시각을 ‘정죄’ 라고 한다.

 

◈정죄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가?


정죄는 항상 명분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끝까지 명분론으로 나간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떠올려보라.
그 비유에서 큰아들의 시각이 정죄의 시각이다.

큰아들이 어떻게 하는가?
둘째 아들이 외국에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버렸다.
그러고 그가 집에 돌아오니까 큰아들이 명분론을 내세우지 않는가.

 

“저렇게 죄짓고 허랑방탕하게 산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줍니까?”


이것이 무엇인가? 명분이다.

반면에 아버지의 시각은 어떠한가?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아들 됨 자체를 즐거워한다.

우리가 부모라고 한다면, 아들이 집을 나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가 불명한데

그가 꼭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바라겠는가?
그는 꼭 돈을 많이 벌어서 돌아와야 하는가?
그는 잃어버린 아들이지 않은가.

그런 아들이 돌아오는 것 자체가 부모에게는 기쁨이다.
이런 생각은 명분론이 아니다.

아들의 생명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시각이고, 하나님의 시각이다.

 

◈우리는 구원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인가?
또, 죄지었을 때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꺼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마귀의 정죄 때문이다.

하루는 한 성도가 내게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목사님, 저는 중대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예배의 자리에 나갑니까.

예배를 2주 동안 빠졌습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괴롭다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께 죄송한 것이다.
그리고 자녀이기 때문에 예배가 그리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돌아오려고 하는데 마귀가 계속 공격한다.
그를 정죄한다.


“네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깨지고 넘어졌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자녀 됨’이다.
이것만 붙들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아버지 됨’,

이것만 붙들면 마귀의 정죄를 돌파하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 전병욱, 돌파력

 

† 말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 1절,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장 22절~24절

 

† 기도 
주님, 부족한 저를 자녀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난과 시련의 때에 마귀의 정죄가 아닌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더욱 묵상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더욱 기쁘고 경건하게 살길 원하오니 주님, 인도하여 주옵소서